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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절히 주기 원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산고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는 아픔과 희생이었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영원히 살게 하신 그 영원하고 무한한 희생, 그 희생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온 우주가 영원히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장 18〜19절)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치르신 예수님의 산고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크기를 깨달아 아는 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요 특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독생자’라는 단어는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본래 원어로는 그냥 ‘독자(獨子)’입니다. 원어에는 ‘생-’자가 없습니다. ‘독생자’가 헬라어로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라는 단어인데, ‘모노-’는 말 그대로 ‘하나(one)’라는 뜻이고, ‘-게네스’는 ‘낳다’라는 의미의 동사 ‘기노마이(γίνομαι)’의 명사형 중 하나입니다. 영어로는 ‘온리 비가튼(only begotten)’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모노게네스’에 해당하는 단어로 ‘야히드(יָחִיד)’가 등장합니다. 야히드 역시 ‘하나’ 또는 ‘독자’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본래 이 단어는 ‘야하드(יָחַד)’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인데, 야하드는 ‘접합하다’ ‘붙어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히드’는 숫자가 ‘하나’라서가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붙어있는 자’라서 ‘독자’를 뜻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모노-’ 역시 ‘하나’라는 의미보다는 ‘아버지와 붙어 계시는 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 하갈 사이에서 낳은 그 형 이스마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너하고 붙어서 한 덩어리가 된 아들, 그렇게 독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주신 독자는 사실상 자기를 세상에 주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덩어리였기 때문에 아들을 주실 때는 아버지 자기 자신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독자’라는 단어는 결코 하나님과 예수님이 떨어져서 따로 계신, 그래서 하나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다는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덩어리가 되셨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이 세상에서 자기를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자신의 자녀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까무러치면서도 놓지 않으려는 손이 부모가 자녀를 잡은 손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죽고 말지 자신의 아들딸을 내어주는 사랑, 그것도 자기 손으로 아들을 두들겨 짓이기는 사랑, 그 사랑은 정말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앞으로도 이 우주에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요한에게 주셨던 영감을 저에게 주셔서 번역하라고 하신다면 아마 이렇게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이기심, 교만에 미쳐버린 우리 자식들을 위해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여 우리를 위해 바치셨도다.” 참으로 목이 메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온리 러브(Only lov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오직 사랑만이 추억을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추억은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를 영원토록 기억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그 때, 새예루살렘성 가운데 가장 높은 중앙에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예수의 보좌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2장 1절).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헬라어 원문에는 학살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닌, 아주 처참하게 난도질을 당하신 어린양, 그 어린양이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무한하고 영원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세월을 통해서 영원, 영원, 영원무궁토록 그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우리와 함께 사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꼭 하늘에 가고 싶습니다. 가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가슴과 예수님의 가슴을 꼭 열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떻게 그런 희생을 하셨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면서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하면서 어버이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노래를 마지막 소절까지 다 부를 자신이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한 자식들이 그 노래를 눈물 없이 어떻게 끝까지 부를 수 있을까 싶습니다. 감히 인간 부모의 사랑도 그렇게 벅차고 고마운데,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고리가 부모인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장 13절)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은 돈도 명예도 현세적 축복도 아닙니다. 정말 간절히 주기 원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입니다. 그분 자신의 혼, 그분 자신의 마음, 그분 자신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사랑이 충만한 나라,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충만한 나라에 함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에베소서 3장 18〜19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창세기 22장 2절
- 요한계시록 22장 1절
- 누가복음 11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