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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끊임없이 율법의 저주를 나타낸다
성경은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한 표현이었습니다. 본래 원문 그대로라면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악의 지식을 알려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 밖에 안 계십니다. 율법이 아니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을 없애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복음, 믿음 이런 단어들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그 사랑의 일점일획이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앞의 말도 복음이고 뒤의 말도 복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삯은 영원한 형벌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고문당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선택하고 고통과 눈물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장 끝내셔야만 했습니다.
심하게 아픈 아이는 엄마가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다독여서 재웁니다. 심한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환자들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진통제도 듣지 않는 극도의 고통이 올 때에는 죽여 달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상을 지키던 이들이 그 환자가 낫기를 바라는 것보다 차라리 주님 안에서 편히 잠들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스러워하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주님 품에 안아주시라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나쁜 말로는 ‘제발 이젠 죽여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저 역시 제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심한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미칠 뻔 했습니다. 아들로서 아파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릴 길이 없었습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그 고통 속에서 저의 모친이 죽어갈 때 저는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저희 어머니를 좀 쉬게 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이렇게 울면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선택하고 고통과 죽음을 선택했을 때 우리가 그 고통으로부터 편히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인간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장 19절)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짓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외치셨던 대상이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겠다”(요한복음 5장 28〜29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표로 양의 가죽옷을 입혀서 내보내셨습니다(창세기 3장 21절). 가죽옷은 용서의 영수증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는 베어버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셨습니다. 선악과나무는 율법에 대한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먹어버린 인간들은 마땅히 죽어야만 했지만 그렇다고 율법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범한 즉시로 응급조치를 시작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24절). 바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이었습니다. 범죄의 결과가 생명과를 먹고 영원히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 저주를 없애셔야 했습니다. 생명과는 다시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 다음에 주실 것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22장 1〜2).
선악과나무를 상징하는 나무가 율법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구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 나무를 홍해 위에 저주의 표시로 들게 하셨습니다. 홍해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그들이 바다 가운데서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물이 갈라지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실 것을 예표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헬라어 원어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이 말이 헬라어로는 우리 위에서 예수님께서 저주의 덩어리가 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말씀에 사용된 ‘휘페르(ὑπέρ)’는 ‘위에서(upon)’ 또는 ‘위해서(for)’라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직역하자면 영어로는 ‘우릴 위해 저주가 되사(becoming a curse for us)’로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의 저주를 내리실 때 예수님께서 그 중간에 끼어들어 오셔서 율법 아래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당신이 직접 저주 덩어리가 되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나무에 대한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이신 예수님을 치는 사건입니다.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린도전서 10장 3〜4절) 반석을 칠 때 사용했던 도구는 쇠가 아니라 나무였습니다. 모세가 나무로 쳤을 때 나무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바위가 터지면서 물이 쏟아지게 됩니다. 곧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터져 돌아가실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터진 반석이 되어 피를 쏟고 돌아가시며 이 상징은 실제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표상과 모형들이 계속 나타나는데 그중에서 나무는 끊임없이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소제도에서도 똑같은 표상을 보게 됩니다. 장작더미 위에 올려 불살라지는 어린양이 나무의 저주를 안고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죽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위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나무의 저주를 온전히 받으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 우리 모두가 들어 있었기에 아담을 밀어내시고 그 아담의 자리에 마지막 아담이 되셔서 율법의 저주를 100%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안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살리심을 받았다고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 모두가 끝까지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분의 구원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끝까지 인내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3장 31절
- 로마서 6장 23절
- 창세기 3장 19절
- 요한복음 5장 28〜29절
- 창세기 3장 21절
- 창세기 3장 24절
- 요한계시록 22장 1〜2절
- 고린도전서 10장 1〜2절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고린도전서 10장 3〜4절
- 에베소서 2장 5〜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