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오디오 듣기(팟캐스트, 데이터 주의)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이제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5절) 물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어떤 이들은 물로 세례(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다시 받아야 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소위 ‘성령 세례(침례)’가 그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는 선후관계가 따로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세례(침례)를 받은 다음에 한 번 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냥 몸에 할례만 받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할례를 통해 죄를 잘라내는 의미를 고민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죄를 잘라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 역시 그렇습니다. 유대의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무조건 내쫓고 새 여자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재혼한 뒤에도 조강지처는 여전히 남편의 소유였기 때문에 집을 나와도 마음대로 어디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모세는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너희가 같이 살기 정 싫으면 ‘이 사람은 이제 내 여자가 아니니 데리고 가도 좋다.’라는 이혼증서라도 써 주어라.”라고 한 것입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구약에는 이혼이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음을 하면 그는 법에 의해서 데려다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혼당한 여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버림받은 여자’라는 뜻입니다. 간음한 남편이 죽고 그의 아내는 진짜 생과부가 되는 것을 두고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여인, 이혼당한 여자에게 재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의 남자들은 모세의 이혼증서를 교묘한 방법으로 이용하여 외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과부의 사회 진입을 위해 사용되었던 이혼증서가 남발되면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편법을 이용하여 새 장가를 들고 이혼증서를 빙자해서 아내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장 31〜32절) 예수님께서 율법의 본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께서 직접 오셔서 율법의 본질이 사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러 온 사람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태복음 5장 17절) “너희가 다 버려버린 율법을 내가 다시 가득 채워주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면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거듭났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이 변화한 것을 가리킬 때 실제로 ‘거듭난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네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유대인으로 거듭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요? 내가 이렇게 다 컸는데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됩니까?” 마음먹고 밤늦게 랍비를 찾아와 깨달음을 구했던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대놓고 면박을 준 것 같아 니고데모는 조금 얼굴이 상기되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무시하시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니고데모의 마음을 보시고 다시 한 번 못을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5절) 도대체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에스겔 36장 24〜28절에 이미 나와 있는 말씀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이혼하고 간 그 여자를 따라가서 또 한 번 더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겔의 이야기입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버리지만 나는 너를 버릴 수가 없다.”
호세아 11장 7절에도 이와 비슷한 기가 막힌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규는 계속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 여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는 표현 가운데 나오는 ‘돌아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회개한다’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회개를 하신다는 말인가요? 무엇을 회개하실 것이 있단 말인가요?
바로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막장드라마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아픈 가슴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음이 에스겔을 통해서 똑같이 나타납니다. 그 사랑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를 다음 글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5절
- 마태복음 5장 31〜32절
- 마태복음 5장 17절
- 에스겔 36장 24〜28절
- 호세아 11장 7~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