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영광
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 중에서 ‘기독론적’이라 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基督)’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며 ‘기독론적 관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번 읽어본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장 14절)는 말씀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읽혀집니다. 주님께서 실제로도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고쳐주시면서 요한복음 9장 5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물건이 탈 때 나오는 파동인데 예수님의 빛은 자기 자신을 태우시던 자기 희생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취는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영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청중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창세기 1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날에 만든 빛과 넷째 날에 만든 광명의 빛은 서로 실체가 다른 것입니다. 이 빛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단순히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물리적인 빛과 사랑의 빛 모두 근원이 바로 하나님 이라는 점입니다. 이 빛이 주어진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확인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주신 아름다운 꽃들과 세상의 삼라만상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평생 소원해왔던 것은 앞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대자연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모든 것들을 보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변의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까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복음 9장 3절) 세상에는 정말 많은 만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꽃도 나무도 하늘도 바다도 푸른 들도 모두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백만 송이 꽃이 아니라 천만 송이, 억만 송이의 꽃들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이 땅에 피어있습니다. 그 맹인으로 하여금 이것들을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빛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자기 희생이 없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타오르는 광원(光源)이 부재합니다. 달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밝게 빛나는 이유는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비춘 인물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 신분으로 팔려간 사람이었지만 애굽을 살린 나라의 빛이 되었습니다. 향후 닥쳐올 7년 동안의 대기근을 혜안으로 내다보고 철저히 대비하여 국민 중 한 사람도 굶주리지 않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루아침에 페르시아 전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다 잡아 죽이라는 칙령을 막고자 금식을 하고 베옷을 입으며 조석으로 기도했던 모르드개도 유대민족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의 조카 에스더는 또 어떻습니까? 왕비의 신분으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왕의 마음을 움직여 유대민족을 대살육의 구렁텅이에서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 복음을 전하다 처참하게 맞아죽고 못 박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 중의 한명이었는데,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고 혼절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죽었다 생각하고 쓰레기장에 버리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들을 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브리서 11장 38절)
우리 모두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주님의 빛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14절
- 요한복음 9장 5절
- 고린도후서 4장 6절
- 창세기 1장 4절
- 요한복음 9장 3절
- 히브리서 11장 3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