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은
우리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약은 무엇일까요? ‘언약(言約)’은 히브리어로 ‘브리트(בְּרִית)’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기본적으로 ‘브리트’는 ‘하나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죄인이 그 은혜에 자기를 완전히 맡겼을 때 둘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바로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이라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받으셔서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는 사건입니다.
흥미롭게도 언약이라는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항상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6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אל)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는 인간과의 언약관계에서 등장하는 ‘공식적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이제 정식으로 너희와 함께 언약을 맺는 입장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יְהוה)’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칭호로 ‘영원한 자’,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영원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분과 ‘영원한’ 이름을 두고 ‘영원한’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은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맺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3절의 말씀에서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언약이 율법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다음에 모세가 출애굽을 할 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스스로 지켜보려고 하는 노력은 모두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만이 언약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로마서 4장 17절 이후로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판 율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은혜가 임했다는 바울의 관점은 칭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율법은 구체화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놓은 것입니다.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 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와도 같습니다. 율법이 각론이라면, 복음은 총론에 해당합니다. 율법과 복음은 동전의 양면이며, 분리될 수도 멀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식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바로 사단입니다. 그는 의가 인간이 스스로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결과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종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을 고행과 수도의 길로 몰아넣는 철학의 밑바탕에는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단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사단이 가장 미워하는 정신
사단이 가장 미워하는 정신은 사랑밖에 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인 그 본질적인 사랑에 대해 근본적인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관계는 ‘주거니 받거니(give and take)’라는 정신 위에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랑을 인간이 오해하도록 하여 율법의 본질을 가려서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로 보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려 어떤 이들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아주 못 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율법폐기론(律法廢棄論)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절대적 사랑의 본성이 없이는 사랑의 율법의 품성을 절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 본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겉으로 잘 지킬지라도 다 위선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악하니”(마태복음 12장 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기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시된 의의 위대한 표준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낮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은 주님께서 그분의 삶을 통해서 이루신 의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분의 본성을 우리 속에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성을 성령을 통해서 넣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쓰는 ‘혼(魂)’이라는 말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께 자신을 맡길 때, 그 일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성경대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출애굽기 6장 3절
- 로마서 4장 13절
- 로마서 4장 17절
- 마태복음 12장 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