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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지난 시간에 공부한 창세기 2장 7절에 등장하는 ‘생기’는 ‘느샤마(נְשָׁמָה)’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루아흐(רוּח)’와 함께 이 단어도 ‘바람’이나 ‘숨’을 뜻합니다. 그런데 ‘느샤마’에는 ‘루아흐’에 없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느샤마’는 ‘나샴(נָשַׁם)’이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인데, 이 ‘나샴’은 ‘숨을 헐떡이다(pant)’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숨을 쉬는 게 아니라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입니다. 이 동사는 성경에 딱 한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이사야 42장 14절) 해산하는 어머니가 숨을 헐떡이는 장면이 그려지십니까? ‘느샤마’는 바로 그 ‘가쁜 숨’, ‘헐떡이는 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기대 속에 아담의 코에다가 숨을 ‘훅’ 불어넣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해산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 중에 있지만 새 생명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아담을 만드셨을 때 동일한 헐떡임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어쨌든 ‘느샤마’는 ‘루아흐’와 함께 서로 번갈아 가며 ‘숨’이란 말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루아흐’는 ‘숨’ 말고도 특히 ‘바람’이라는 의미로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장 11절) 여기에 쓰인 ‘바람’은 전도서 3장 19절에 등장하는 ‘호흡’과 같이 ‘루아흐’입니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이 성경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루아흐’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모두 쓰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한 절을 넘어 21절에 가면, 갑자기 이상한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은 ‘루아흐’를 난데없이 ‘혼(魂)’이라는 말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또 전도서 12장 7절에 가면 ‘영(靈)’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모두 한 단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숨’이나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분명히 ‘생기’이지 ‘영혼’이 아닙니다. 생명의 숨일 뿐이지 영원불변의 영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사상(Hebraism)과 헬라사상(Hellenism)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12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심령을 빚어 넣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지었다’는 말은 ‘야짜르(יָצַר)’라는 동사인데, 흔히 도자기를 빚을 때 흙을 주물러서 빚는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하나가 되었을 때, 성경은 그 상태를 또한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9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사도 바울이 썼던 ‘영’이라는 표현은 구약에 무수히 등장하는 히브리어 용례를 단지 헬라어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언어는 헬라어로 되어 있지만, 면면히 흐르는 사상은 구약의 것입니다. 헬라인들이 평소 가졌던 ‘영-육 이원론(mind-body dualism)’의 영과 육은 결코 아닙니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사단과 하나가된 상태 '육신'
여기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육신’이라는 개념은 이미 창세기부터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는 악이 관영하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떠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과 함께 계시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육신이라는 개념은 사람의 영광,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지 않고 마귀의 영과 함께 한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사단과 하나가 된 상태를 성경은 끊임없이 ‘육신’, ‘육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신약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육신’도 같은 개념입니다. ‘육체’ 혹은 ‘육신’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바사르(בָּשָׂר)’라고 하는데, ‘살덩어리(flesh)’를 가리키는 이 단어를 성경에서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의 영이 마귀의 영과 하나가 된 상태를 ‘육체’로,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가 된 상태를 ‘영’으로 불렀기 때문에, 영과 육체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상대어였습니다.
어쨌든 ‘영’이라고 하는 단어가 대단히 다양한 용례로 쓰였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영’이 나오면 앞뒤 문맥을 잘 살펴봐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헬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영-육 이원론적 개념으로 ‘영’과 ‘육’을 해석합니다. 그릇된 성경 이해입니다. 물론 성경을 여러 가지 현대 사조에 비추어 해석할 필요도 있으나, 먼저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분석하는 것이 선행하지 않으면 자칫 화려하지만 공허하고 ‘허탄한 이야기’(디모데후서 4장 4절)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을 구하는 귀한 시간이 계속 이어지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창세기 2장 7절
- 이사야 42장 14절
- 전도서 2장 11절
- 전도서 3장 19절
- 전도서 12장 7절
- 스가랴 12장 1절
- 고린도전서 6장 17절
- 로마서 8장 9절
- 창세기 6장 3절
- 디모데후서 4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