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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4〜15절의 말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를 통해 광야에서 실제로 구리로 만들어진 뱀이 나무에 매달렸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죄가, 즉 저주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여기 나타난 나무는 창세기 3장 14절에서 뱀에게 내리신 저주입니다. 선악과나무에 앉아 선악과를 따 먹고 하와에게도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만든 그 뱀에게 내리신 저주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9절에 보면 용은 곧 옛 뱀이라 하고 있습니다. 날개와 손발을 가졌던 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이 선악과를 먹고 뱀이 된 것입니다. 날개와 손발이 없어진 모습으로 몸만 남은 용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아무튼 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는 용이나 나무로 만든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용의 모습을 장식한 조형물이나 건축물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이 나무들은 다 선악과나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선악과를 ‘선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이라는 말로 길게 풀어썼는데, 본래 히브리어로는 ‘지식’이라는 뜻의 ‘다아트(דַּעַת)’라는 단어만 쓰였습니다. 여기에 ‘나무’를 뜻하는 ‘에츠(עֵץ)’가 덧붙어 영어로는 ‘트리 오브 날리지(the tree of the knowledge)’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지식의 나무’쯤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며 ‘율법’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쳐주는 기준이 됩니다.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준 사랑을 다 받고 누리면서 그 사랑을 준 존재가 나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주신 것이 선악과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신호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어버렸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먹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무시하고 먹어버린 것입니다.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을 먹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부추깁니다.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못 먹게 하신 거야, 이 바보야! 내 말을 들어봐, 내가 지금 이렇게 먹고 있어도 안 죽잖아? 이 과일은 먹는다고 죽는 음식이 아니야. 네가 이것을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못 먹게 하신 거야. 빨리 먹어봐.”
하와가 이렇게 유혹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강제로 막게 되면 온 우주에 영원한 의심, 영원한 불신을 만들어 낼 것이기에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계셨습니다.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자유의지, 영원한 자유를 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면 마귀의 말이 맞는지 아버지의 말이 맞는지 우주의 거민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버지께서 용과 같이 저주를 받고 이 나무에 매달렸어야만 했습니다. 용이 손발과 날개를 잃어버리고 몸만 남은 용인 뱀이 되었을 때 이 뱀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버티다가 결국 힘없이 땅에 떨어져서 배로 기어 다니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곧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이 처음으로 그렇게 창세기 3장 14절에서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율법의 나무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였습니다. 뱀과 같이 저주를 받게 된 인간은 4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죄의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고, 그 이후 아담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는 존재,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담을 끝내는 아담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아담으로 돌아가시는 마지막 아담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자로 오셨지만 하늘에서 나신 분이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4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될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시고 당신이 대신 율법의 저주 아래에 매달리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라디아서 4장 1절)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통곡하시면서 외치셨던 말씀, “독사의 자식들아!”는 저주의 소리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바르게 산다는 바리새인들과 회칠한 위선자들을 보시고 통곡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그분은 영원한 죄 없는 몸으로, 죄 없는 씨로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그 영광의 몸으로, 죄 없는 유전자로 다시 부활시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그가 우리를 다시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생명의 부활에 우리 모두 다 참여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14〜15절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창세기 3장 14절
- 요한계시록 12장 7〜9절
- 창세기 3장 14절
-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고린도전서 15장 47절
- 갈라디아서 4장 1절
- 빌립보서 3장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