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지난 글에 이어서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성경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재해석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로 읽고 계십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의 의미를 훨씬 넓혀 주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는 표현에서 과거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만 사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은 구약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말씀들입니다. 실제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이미 구약에 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만드셔서 쓰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장 18절)라는 말씀이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지 율법주의에 매몰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준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칙에 의해서 십계명을 다시 조명해 보면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형제를 바보라고 멸시하는 것까지 다 살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자기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분노의 씨앗이 자라서 결국 살인이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분노는 예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포를 행치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이사야 53장9절).
멸시의 반대말은 존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양심이 화인 맞은 철면피 같은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존경과 친절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이시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율법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멸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엄연히 사랑하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이들을 향해 사도 야고보가 “너희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되물은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도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로마서 14장 4절)고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행위는 그를 하인으로 두고 있는 주인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갑질’이라는 용어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편의점이나 마트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손님은 왕’이라는 명분으로 막 대하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읽고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대하는 상대방도 따지고 보면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이후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가 된 아들을 멀리서 보고 버선발로 뛰어와서 아들을 와락 끌어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21〜22절
- 마태복음 22장 39절
- 레위기 19장 18절
- 이사야 53장
- 야고보서 4장 11절
- 로마서 14장 4절
- 누가복음 15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