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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돈을 ‘맡기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안에 ‘맡기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헌장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말씀을 꼽으라면 아마도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들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에서 ‘여호와를’을 직역하면 ‘〜를’이 아니고 ‘〜안에’입니다. 영어로는 ‘빌리브 인(believe in)’으로 동사 뒤에 전치사 ‘인(in)’을 씁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여호와 안에 믿으니’에서 ‘믿으니’는 히브리어로 ‘아만’이라는 동사인데 ‘맡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종합해서 다시 번역하면 ‘여호와 안에 맡기니’가 됩니다. 마치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장 3〜5절) 하라는 일은 하지도 않고 나쁜 짓만 저지른 삯꾼을 보고 좋아할 주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하지 않았던 무뢰한에게 “의롭다!”고 하는 주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셈법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공식입니다. 월급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주인에게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영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황당한 주장을 이해하려면 포도원의 비유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길에 나가서 “일당을 후하게 쳐줄 테니 일을 좀 도와 달라.”고 말하면서 일꾼들을 모았습니다. 아침에 일을 시켜 보니 일손이 부족했는지 오후에 나가서 다시 일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을 마무리해야 할 오후 늦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도 또 일꾼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 온 순서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한 시간, 어떤 사람은 두세 시간 밖에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을 모두 마치고 주인이 일당을 주는 시간이 왔습니다. 일하러 온 순서의 역순으로 일당을 주겠다며 주인이 일꾼들을 한명씩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마태복음 20장 10절)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뙤약볕에서 일을 했는데 마지막에 고작 한 시간 일을 했던 일꾼과 똑같은 일당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곳저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1〜12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에게 일당을 10만원 줬다면 새벽부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20만원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앞으로 동네에 포도원 주인에 대한 소문이 돈다면 일꾼들은 무조건 일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에 일하러 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인은 우리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3〜14절)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사실은 아침부터 와서 하루를 계산하고 일을 한 사람은 정당히 자신이 받을 일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원래 처음 약속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먼저 온 일꾼에게 있습니다. 일당을 받는 삯꾼의 입장에서는 일이 아닌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삯이 작거나 부족하면 누구나 화가 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반면에 맨 마지막에 왔던 삯꾼은 어떠했을까요? 속으로, ‘난 한 게 없으니 만원이나 받을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 일당을 온전히 다 받았을 때 그 기분이 과연 어땠을까 우리는 쉽게 상상이 안 갑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게 된다고 말합니다. 일한 것 하나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절)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서 아침부터 온 일꾼들처럼 삯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있는데 보상으로 이 정도는 주시지 않을까?’, ‘나는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일을 하며 살았으니 은혜를 입는 게 당연해.’ 이런 것들은 다 삯군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평생 나쁜 짓만 했던 십자가 한 편의 강도처럼 예수님께 얼굴도 들지 못하고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던 마음이 은혜를 바라는 더 합당한 모습이 아닐까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무슨 공로가 있거나 우리의 믿음이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창세기 15장 6절
- 로마서 4장 3〜5절
- 마태복음 20장 10절〜14절
- 로마서 4장 6〜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