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죄를 보여주는 거울
율법이 하는 정죄는 이것이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진단한 다음에 큰 병에 걸렸으니 잘못하면 죽으니 꼭 치료받고 건강하게 살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처럼 율법은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수술하고 살라고, 용서받고 살라고 우리에게 사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율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자기들을 정죄한다고 생각한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율법은 그것을 범하는 길로 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는 영생한다는 사실을 율법은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13절 다시 보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죽음의 원인인 죄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음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도록,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14절 뒷부분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고 죄와 거기에 동의하고 따라간 죄 아래 팔린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연약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못하니까. 여러분, 율법은 강하다. 절대적이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강한 사랑의 표현이다. 어떻게 그것이 연약한가? 율법이 하는 일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연약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꼭 살라고 우리에게 간청하는 것이 율법이다.
흔히 율법이 아주 어렵고 두려운 것으로, 특별히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자꾸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그것을 구별하고 있다. 육신의 본성에 팔린 우리가 잘못된 것이지 율법은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율법이 굳게 서야만 우리가 가야될 길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율법이 만약 희미한 빛을 비춘다면 우리는 사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치료받기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다시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의 이야기는 너무나 분명하다. 율법이 죄냐 라는 문제를 놓고 사도바울은 율법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결코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고 또 율법을 지키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7절에 사도바울이 표현한 말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영어로 can not 이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 원수다. 원수가 사랑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사랑하면 친구이지 원수가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
여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이 로마서 7장에서 ‘이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7장 6절에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 ‘이제’라는 말이 나타난다. 이 ‘이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로마서 7장에서 이 이제라는 단어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단어이다. 이제 벗어났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7장의 경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의 모습이다. 소위 회심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제’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 번의 ‘이제’라는 말이 나타난다. 헬라어로는 ‘누니’라는 말로 썼는데 이 ‘누니’라는 말은 ‘이제’라는 말이고, ‘바로 지금’ ‘현재’를 좀 더 강조하는 말이다.
로마서 7장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 다시 ‘이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 17절에 나타난 ‘이제’라는 단어도 역시 같은 말이다. 하나님과 원수인 이 육신의 본성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원수다. 반역한다. 대적한다. 그런 본성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고 있다. 법적으로 벗어난 상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들어온 상태를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두 번째 ‘이제’라는 말 앞에 나타난 14절에 있는 말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과거에 회심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 분명히 미워하고 있다. 이것은 육신의 본성에서 벗어난 다음이다. 그리스도 은혜 안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결코 악을, 죄를 행하기를 원치 않고 있다.
그런데 16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죄이다. 내 속에 있는 죄, 이 내 속에 거하는 죄를 흔히 죄의 본성이라고 한다. 육신이라고도 표현하고 헬라어로는 ‘싸르크스’ 이것은 원래 ‘고기’를 가리킨다. 우리 몸의 부드러운 부분을 보통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죄의 본성’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가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된 육신 속에, 우리 세포 속에 가지고 있는 죄의 유전적 본성이다. 이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이미 변질된 유전적 본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아도 역시 같다. 그것을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라고 표현한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이 똑같은 말,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 17절에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다시 20절에 가서 똑같은 말을 다시 반복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렇게 반복할 만큼 사도바울은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심한 고난을 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 이 죄의 본성과의 투쟁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 불가피한 선택을 하나님께서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유전적 형질을 다 없애버리셨다면 우리가 천사처럼 선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속죄하는 보혈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 선하고 의롭고 사랑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데 더 이상 죄 지을 일이 있겠는가? 아담처럼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지하거나 그분의 사랑 안에 살지 않아도 넉넉히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영원한 사랑의 교제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다 쏟아 부으시고 또 우리가 그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다 드리기를 원하신다. 마치 우리 부모와 자식사이에 사랑의 관계처럼 말이다.
자식들은 어려서는 자식이지만 나이가 들면 친구가 된다고 한다. 엄마하고 딸이 친구가 된다. 왜냐하면 엄마가 산 인생을, 그리고 같은 유전적인 형질을 다 나타나기 때문에 나중에는 겉도 비슷해지고 속도 비슷해져서 거의 같다. 그래서 서로 가장 잘 통하는 같은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친구처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이성
여기서 우리 기억해야 될 사실은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은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도, 회심 후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해야 될 사실은 회개, 회심은 반복되고 깊어지는 경험이다. 일회적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이 경험했던 똑같은 경험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이 회심의 경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자신의 육신의 본성을 더 깊이 경험하는 일은 계속되는 것이다. 일생에 계속되는 과업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더 깊이 닮아가는, 성화되어가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될 말씀이 있다. 이것은 7장 25절에 있는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마음’이라는 단어, 이 단어는 본래 일반적으로 쓰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아니다. 이 마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쓸 때 그냥 우리가 흔히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들어 있는 부분인 마음, 이런 부분을 나타날 때는 헬라어로 ‘카르디아’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 마음 중에서 우리의 어떤 판단력, 무엇인가를 깨닫고 또 의지력을 나타내는 어떤 선택의 의지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할 때에는 ‘누스’라는 단어를 썼다. 여기 로마서 7장 25절에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할 때에는 ‘마음’이 ‘누스’이다. 도덕적인 판단력이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의지력이다. 일반적으로 이 ‘누스’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이성’이라고 번역한다.
‘누스’라는 단어를 로마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몇 용례를 찾아보자. 먼저 로마서 1장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기 앞에 나타나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기에서 ‘마음’은 ‘에피그노시스’라는 ‘지식’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지성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곧 그 이성대로 내버려 두시겠다고 하셨다. 여기 상실한 이성이 나타난다.
또 하나의 ‘이성’이라는 헬라어의 ‘누스’라는 단어는 로마서 12장 2절에 나타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여기에서의 마음은 누스이다. “너희 이성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성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다. 판단력이다.
그래서 이 로마서 7장에 나타난 마음의 법,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한다’는 말은 거듭난, 새롭게 된 새 본성으로서의 이성이다. 그래서 이 본성이, 새 판단력이, 새 이성의 누스가 날마다 새롭게 되도록, 새롭게 창조함을 받도록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성의 마음은 분명히 회심한 뒤의 모습이다.
기억하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은 회심 바로 직전, 예수님을 만나서 거듭나기 직전에도, 회심한 후에도,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상태에서도 도덕적인 판단력이 새롭게 되고 깊어질 때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해 없게 되기를 바란다. 거듭되는 회심의 깊어지는 경험 속에서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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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로마서 8장 7절
- 로마서 7장
- 로마서 1장 28절
- 로마서 12장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