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우리는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우리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원하고 행하는 것을 반드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질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우리의 애정은 그의 중심에 두게 되고 우리의 사상은 그리스도와 조화될 것이다.
여기 이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는 이들이 있다. 노예 의지론, 의지 자체가 다 망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실은 의지라는 것은 아무리 망가졌어도 그 의지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의지는 살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망가지고 짓밟히고 더러워졌을지라도 내가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노예화된 의지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다.
기억하라!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고칠 수 없고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하고 내 마음의 의지를 그분에게 드리는 것이다. 병들고 연약한 의지를 드리는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씻으시고 그 의지를 강건케 하셔서 당신의 은혜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의지를 활용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의지를 강하게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줏대가 세다. 심지가 굳다. 이런 표현들을 한다. 절대로 그것은 성경과 다른 잘못된 표현이다. 의지는 내 힘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그분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내 의지를, 연약한 의지를 드릴 뿐이다. 그게 믿음이다. 맡기는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의지를 붙잡으시고 깨끗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당신이 우리의 의지를 잡으신 그 손으로 의를 행할 수 있게 우리의 의지를 만들어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은혜이다.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더 이상 죄가 주관할 수 없다. 그 이야기는 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주 생략법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법아래’라는 말에는 분명히 그 법하고 그 다음 말 중간 사이에 뭐가 들어 있다. 정죄다. 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반대말인 ‘은혜’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이미 율법이 다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이다. 율법을 빼고 은혜라는 말을 설명할 수 없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그 은혜아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은혜에 자기를 믿음으로 맡겼기 때문이다.
이 말의 반대말은 ‘법 아래에 있다’ 즉 ‘법의 정죄 아래에 있다’ 이다. 이것은 분명히 은혜의 반대말인 정죄이다. 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지 더 이상 법이 필요 없다, 율법은 필요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율법이 내리는 정죄 아래 있지 않고 율법이 성취되는 일이 일어나는가? 다시 설명하자면, 율법이 요구하는 그 모든 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께서 평생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우리를 의로 여겨 주셨고 우리는 그 의를 분명히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에스겔의 새 언약
로마서 6장에서 하는 말씀은, 이 율법이 실제적인 개인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 의지를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 그 의지를 받으셔서 그렇게 율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율법이 지켜질 수 있도록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유명한 에스겔의 새 언약이다.
에스겔 36장 24~27절 가운데 보면, 어떻게 실제로 율법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지를 선지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케 하신다는 것이다. 24절,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신다. 우리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아서 끌어안으시고, 등에 업으시고, 어깨에 메시고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다. 은혜로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25절,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두 번째 그렇게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물로 모든 죄에서 너희를 정결케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 물은 민수기 19장에 나오는 잿물이다. 붉은 암송아지가 죽어서 남긴 흔적이다. 죄 값을 갚은 영수증이다. 죄 값을 다 치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물로 정결케 하신 다음에는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6절에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새 마음과 새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여기 영이라는 것은 본성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이다. 그리고 그 새 마음은 새 심장이다. ‘마음’이라는 말은 ‘심장’이라는 말이다. 새 숨(영)을 쉬고 새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은 상태이다. 여기까지를 이름 하여 소위 ‘입혀주시는 의’라고 한다. 새 본성 새 마음이 생긴 상태이다.
용서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용서로 끝났다면 정말 우리는 또다시 어떻게 그 율법을 따라서 살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사랑의 영(본성)이 우리에게 심어진다. 탕자에게 옷을 입힌 그 옷은 새 마음, 새 영(본성)이다. 물로 목욕시킨 것은 물로 정결케 하신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새 옷을 입히셨다.
그 다음에 이 새 영속에, 새 마음 속에 27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새 영속에 성령, 내 영을 너희에게 붓겠다. 성령을 부으셔서 이 새 영속에 들어가서 성령께서 새 마음이, 새 심장이 뛰게 하시고 율법을 지키게 해 주시겠다고,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용서가 되어 질 수 있도록 너희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율법이 지켜지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8장 4절에서 보게 될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표현이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지켜지게 되는 상태, 이 상태를 다 끝내서 나중에 27절 맨 끝에 보면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한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지켜지도록 성령이 역사하셔서 지키신 율법을 우리가 지켰다고 곧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것이다.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것은 소위 ‘나누어 주시는 의’라고 그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정리하면 이 두 개의 중요한 입혀주시는 의와 나누어주시는 의라는 두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이 나누어 주시는 의가 내가 내 의지를 주님께 완전히 내어 맡겼을 때,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는 너희 몸을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바로 그 믿음이다. 맡기는 믿음이다. 앞의 6장 첫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종
이 상태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 13절에서 너희 죽을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럴 때는 절대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말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비록 우리 안에 육신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이 육신의 본성을 사단이 충동질 할 때 다시 우리가 죄를 짓지만, 성령을 따라서 행한 우리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단 우리가 또 다시 육신의 본성,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본성을 따라 갈 때는 죄를 지을 수 있다. 이 두 이야기가 마치 모순처럼 보이지만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율법아래 산다는 말은 여러분과 내가 스스로 율법을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럴 때는 영락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절대적 사랑의 표준에 우리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의는 없앨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저주이다. 그것은 영원한 불행과 고통에 죽음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16절에 표현하시기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여기 ‘순종’과 ‘종’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이 믿음, 자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이 믿음을 사도바울이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단어는 같은 단어이다. 기억하길 바란다. 순종하여 종이 된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자기 의지를 자원하여 맡기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이나 순종은 계속해서 같은 단어로 신약성경에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3장 18, 19에도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불순종했다고, 믿음으로 순종했다고 말씀한다. 순종은 믿음의 한 다른 모습이다. 믿음이다. 맡기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내 안에서 그분의 일을 이루시도록, 그분의 의를 이루시도록, 내 안에서 율법을 지켜 줄 수 있도록 내게 주신 새 본성 새 마음을 다시 성령에게 맡기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이 내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순종이 아니다. 그래서 자원한 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했으면 내가 왜 종이겠는가? 내가 스스로 순종했으면 내가 주인이다. 내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다. 그것도 새 마음과 새 영을 드리는 것이다. 옛 본성을 드리는 게 아니다. 옛 본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에 갖다 맡기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새 영과 새 마음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성령께 맡기라는 말씀을 순종할 때, 그렇게 율법의 요구가, 율법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영생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19~23절에 주옥같은 말씀을 반복하였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영생’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로마서 6장 23절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영생은 분명히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있는 영생과 같은 영생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계속적으로 그분에게 맡기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영생이란 믿음, 그분께 끊임없이 내게 주신 새 영과 새 마음을 맡길 때, 순종할 때 순종의 결과,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영생이다.
일회적인 믿음이 아니다. 일회적인 맡김이 아니다. 끊임없이 그분에게 계속해서 믿음으로 맡김으로 결국은 그것이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것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 영생이다. 믿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맡기는 것이다. 갈라디아 5장 6절에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에 감동이 되고 그 마음이 녹아져서 정말 그 사랑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랑의 결과가 믿음이고 순종이다.
아담이 범죄 한 그 자리에 이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고, 거절했고 마귀의 사랑을 선택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고, 소위 맡기는 믿음이 끊어지고 마귀에게 자기를 맡김으로 마귀에게 순종하게 되고 그래서 범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얼마만큼 받느냐에 달려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의 사랑을 받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순종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녹여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죄 된 나를 용서하신 그분의 사랑에 내 자신을, 죄 된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즐겁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의를 이루시도록, 자기를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믿음의 의! 이것을 로마서 6장은 계속해서 다른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죄는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는, 다시 말하면 죄에게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사망에 이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자기를 계속적으로 내어 맡기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다. 이미 얻었고 얻을 것이다. 이 사실이 로마서 6장에 말하고 있는 기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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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로마서 6장 14절
- 에스겔 36장 24~27절
- 로마서 8장 4절
- 로마서 6장 13절
- 요한일서 5장 18절
- 로마서 6장 16절
- 히브리서 3장 18,19절
- 로마서 6장 19~23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갈라디아서 5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