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 제물
‘믿음’이란 맡기는 것이다. 어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손에 우리의 죄 된 인생을, 죄 된 본성과 양심을 그 용서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이다. 로마서 3장 24절에 ‘구속’이라는 말은 ‘속량’이라고도 하는데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그에게 자유의 신분을 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죄의 노예인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가 없다. 25절에 가면 그 값을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한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짜로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 우리가 날 때부터 지은 모든 죄를 예수께서 다 가져가시고, 죄가 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다. 그 놀라운 속량, 속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결단코 그 속량의 대가 없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헬라어로 ‘디카이오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뒤에 붙어있는 ‘오’라는 단어는 ‘만든다’는 뜻이다. ‘의를 만들다’ 그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칭의의 주체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뒤에 나오는 ‘의’는 일반적인 말로 ‘디카이수네’라는 말인데 그것은 ‘의의 상태’ ‘의롭게 된 죄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 하나의 단어는 ‘디카이오마’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의의 열매’를 말한다. 로마서에는 ‘율법의 요구’라는 말로 번역했고,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고, 또 요한계시록 15장 4절에서는 ‘주의 의로우신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들은 예수께서 이루셨던 의, 다시 말하면 죄 없이 사셨던 그 의의 행실 전체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그 상태를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어서 우리에게 넘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실 때만 우리는 의롭지 결코 우리 자신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다.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굴복하다’는 말로도 표현했다. ‘자신을 던진다’ ‘맡긴다’ 그런 여러 단어들을 사용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 로마서 3장 25절에 ‘화목제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우리의 속죄를 위한 대가이다. 이 ‘화목제물’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말인데 그 말의 또 다른 용례가 히브리서 9장 5절에 나오는 ‘속죄소’라는 말이다.
지성소 안에 속죄소가 있다. 그 속죄소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죄를 씻어내고 없애는 자리이다. 히브리말로 이 ‘속죄소’라는 말은 ‘카파르’라고 하는 ‘덮어서 지워버린다’는 말의 명사형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앉으신 자리는, 보좌는 죄를 덮어서 지우시는 자리이다. 무엇에 의해서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이다.
용서하시는 "의"
또 로마서 3장 25절에 ‘간과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리스 말로는 ‘파레시스’라고 하는 이 말은 ‘넘어 간다’ ‘지나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구약에 나와 있다. ‘아바르’라는 동사로 ‘지나간다’ ‘넘어 간다’는 뜻이다. 유월절에 피를 보고 ‘넘어갔다’라고 말했다. 죄인 대신 양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일의 노예만이 아니라 우상의 노예가 되었다. 저녁마다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곳에 가서 그들은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 음란한 잔치를, 라이브 쇼를 밤새 보아야 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광야에 나왔을 때 첫 번째 한 일이 그것이 아닌가? 모세가 사라지자 그들이 애굽에서 보았던 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고 일어나 뛰놀았다.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넘어 지나 갈 때는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희생을 상징했던 그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 집을 넘어가셨다. 소위 ‘용서한다’는 말로, 로마서에는 이 말을 ‘간과 하신다’는 말로 사용했다.
바울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했던 복음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차별이 없다는 말,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붙잡아야 할 것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누구든, 어떤 배은망덕한 인간도 용서하시는 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가룟유다는 용서를 받기를 포기하고 돌아서서 갔기 때문에 그 용서를 받지 못했지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를 용서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죄도 십자가에 지고 가셨다고 분명히 믿는다. 그러기에 그분은 가룟유다의 발도 씻기신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죄를 다 해결하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를 드러내셨고 또 죄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도 역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그 ‘의’ 자체, 율법의 내용 자체가 절대로 훼손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을 결단코 누구도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완전한 것이다. 하나의 점이나 흠으로도 결단코 손상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누가 감히 손상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의 품성의 표현인 사랑의 율법은, 영원히 이 우주를 지배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모든 영광을,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모든 행위들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루 종일 믿음으로 잘 살았다 싶으면 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했다 싶으면 저녁에 들어와서는 베개머리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믿음대로 잘 살게 해주시고 선하고 의롭게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떳떳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한다. 그리고 어쩌다가 조금 실수하고 죄를 범하면 그날 저녁에 와서는 그냥 엎드려서 ‘정말 불쌍하고 속절없는 죄인을 하나님 용서하시고 구원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억하라!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생애를 살았을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뜨거운 헌신을 드렸을지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와 함께, 우리 안에 심어진 예수님의 사랑의 본성이 성령에 의해서 밖으로 나타난 결과임을! 성령의 역사임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시작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 된 이기적인 본성을 끊임없이 그분의 용서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작이다. 인간은 외적행동을 교정할 수는 있어도 심령을 변화시키거나 정결케 할 수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려면 먼저 그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곧 위로부터 오는, 위로부터 받은 새 생명이 있어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함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외적인 행동을 교정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대접의 안을 먼저 깨끗하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여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본성의 정결함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그 일이 우리의 외적인 행동이나 말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품성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내 본성의 양심을 비교해보는 시간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말씀들을 자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그분의 본성이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양심이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그 본능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의 본성 앞에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우리의 본성을 날마다 비추어 보아야 한다.
자기는 영원히 없어져도 좋으니 저들을 용서주시고 살려달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도는 정말 온 우주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의 바닥이 무엇인지를, 우리 아버지의 심장의 바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바닥이 드러난 장소이다.
요한복음 12장 23절에 예수님께서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했다. 그것은 곧 그의 죽으심을 나타냈다. 요한복음 12장 27, 28절,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이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옵소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면서, 영원한 죽음에 자신을 던지시면서 불쌍한 자식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은 이미 내가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로 오셨을 때,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피 덩어리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노래했던 그 노래,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시면서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심판하시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우리는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우리가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 우리의 죄악의 품성, 그 품성 대신에 주님의 죄를 범하지 않고 사랑으로만 사셨던 그 생애, 그분의 그 품성이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바 될 것이고 받아 들여진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죄 된 본성과 모든 죄를 주님께 다 맡기지 않겠는가? 그분의 이 놀라운 사랑과 용서에 우리 자신을 다 내어 맡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경험을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하고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죄악의 품성, 그 품성 대신에 주님의 죄를 범하지 않고 사랑으로만 사셨던 그 생애, 그분의 그 품성이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바 될 것이고 받아 들여진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키워드 : 믿음, 구속, 속량, 화목제물, 속죄소, 간과, 유다, 하나님께영광, 의
성경구절
- 로마서 3장 24절
- 요한계시록 19장 8절
- 요한계시록 15장 4절
- 로마서 3장 25절
- 히브리서 9장 5절
- 로마서 7장 25절
- 요한복음 12장 23절
- 요한복음 12장 27,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