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사랑 속에서 사는 우리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 나타난 번역의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우리말로 번역했다. 역시 같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이라는 동사적 의미가 담긴 단어 ‘피스튜오(πιστεύω)’가 사용된 것이 아니고, ‘믿음’ 즉, ‘피스티스(πίστις)’라는 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다. ‘~을’이 아니고 ‘~의’이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앞에 갈라디아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던 ‘나’라고 하는 그 존재는 옛 죄의 나이다. 죄 된 나이다. 죄 자체인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다. 이 죄의 결과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지시고 죄가 되어 돌아가심으로 이 죄의 결과는 없어졌다. 다시는 죄 값을 갚을 필요도, 이유도 없어진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8절 말씀대로이다. 더 이상 속죄하는 즉, 죄를 갚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이유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를, 영원한 해방을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죄가 더 이상,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어졌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어 주셨다는, 죄 값을 이미 다 갚으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을 즉, 복음을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용서의 사랑에, 은혜에 자기를 믿음으로 맡길 때, 죄 값 갚은 영수증을 찾아감으로 죄를 내어 놓고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용서의 영수증을 찾아가서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갈라디아 2장 20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 말고 새로운 나, 이것은 거듭난 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나, 이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신실하심 즉, 변하지 아니하심, 변하지 아니하는 사랑, 불변의 사랑 그것을 신실함,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 변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믿음, 사랑의 신실함 속에서 거듭난 나는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신실하심, 변하지 않으심, 불변의 사랑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내가 그 불변의 사랑 속에서 살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라는 말에는 그 분의 변할 수 없는 사랑과 더불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그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엄마의 변할 수 없는 사랑 속에 산다. 엄마가 우리를 향한 사랑이 변하는가? 절대로 안 변한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다. 천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엄마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마귀가 들어가서 사람이 완전히 마귀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변할 수 없다. 그것을 사랑의 믿음 혹은 신실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도, 로마서 3장 22절이나, 지난 시간에 공부한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본래 그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변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예수님이라는 말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어구 자체가 똑같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죄인 되었을 때에 자기 죄를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고, 거듭나서도 그 분의 변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맡기는 믿음이 있다. 나중에 다시 정리해 드리겠지만, 믿음은 두 개가 있다. 죄를 맡기는 믿음이 있고, 거듭난 마음을, 새 마음을, 새 영을 맡기는 두 번째 믿음이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참 믿음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슈로 붉어지면서 로마 가톨릭이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해서 수 십 년 동안 종교회의를 했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론은 루터의 이야기가 맞지 않다고 해서 천주교회가 나름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신학을 정립을 한다. 그 신학이 지금까지 천주교의 신학이고 결론이다.
사도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하였을 때에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 “의인은 오직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였을 때 신약에 와서는 사실은 세 번 인용 되었는데 ‘그의’라는 말도 빠졌고, ‘오직’이라는 말도 빠졌다. 그런데 우리 한글 번역에는 로마서 1장 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오직’이라는 말은 사실은 없다. 그냥 단순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렇게 되어 있다.
지난 시간에 공부했지만, 하박국서에 나오는 그 원문은 분명히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이라는 말이 없다. 그런데 왜 한글 성경, 개역 성경에는 ‘오직’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그 단어에다가 많은 것을 자꾸 첨가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순수한 믿음이라는 말에다가 로마 가톨릭이 다른 말을 자꾸 섞는 것 같이 보여서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오직’이라는 말을 번역을 해놓았다. 헬라어 원문이나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only’라는 말은 사실은 없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말씀이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이 그대로 인용이 되었다.
왜 이런 번역이 가능했을까? 시장에 가서 참기름을 찾으면 그냥 참기름을 사면되는데 어떤 분들이 여기에다가 유채기름을 섞든지 들기름을 섞든지 다른 기름을 섞는다. 그래서 이 참기름이라고 하는 말이 부끄럽다. 그냥 참기름이 아니라 다른 기름이 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파는 기름은 ‘진짜 참기름’이라고 말을 한다. 그것도 잘 안 믿으니까 그 앞에다가 ‘100% 진짜 참기름’이라고 한다. 그것도 말을 믿지 않으니까 ‘순 100% 진짜 참기름’이라고 한다.
단순히 참기름이라고 하면 될 텐데 다른 것이 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 것은 섞이지 않았다고 이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다. 루터가 왜 ‘오직’이라는 말을 거기에다 붙였는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이라는 것 말고 가톨릭의 신학적 입장에서 만들어 놓은 많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 ‘only faith’, ‘only by faith’ 그리고 그것이 개신교 신학이 되었다.
중세기는 신학이 라틴어로 했던 신학이다. 왜냐하면 로마가 지배했던 로마 가톨릭 안에서 로마 나라 말, 즉 이태리 말을 썼다. 그것을 Latin이라고 한다. Latin어로는 ‘sola fide’라고 한다. ‘sola’는 ‘오직’이다. 혹시, 이런 말들을 들으셨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린다. ‘fide’는 ‘믿음’이다. 오직, 즉 ‘sola’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느냐?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로마 가톨릭이 자꾸 다른 말을 넣는 것 같이 보여서 아예 그것을 근절하는 의미로 ‘sola’라는 ‘오직’이라는 말을, 그리고 우리 한글 개역 성경도 ‘오직’이라는 말을 갖다 써 넣은 것이다.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믿음은 그 자체가 그냥 믿음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이 믿음대로 우리 모두가 살아야 된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성경구절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히브리서 10장 18절
- 히브리서 9장 12절
- 디모데후서 3장 15절
- 로마서 3장 22절
- 갈라디아서 2장 16절
- 하박국 2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