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하심
이사야 6장 3절에 나타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거룩의 의미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구별하여 바치셨던,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를 바치셨던 사랑, 그 가운데에 성령님도 함께 거룩에 동참하신 것을 보게 된다. 구별하여 바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 11절에는 분명히 하나님 속에 성령께서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바치실 때에 성령님께서 그 아버지와 함께 아들을 제물로 우리에게 바치셨다고 말씀할 수 있다. 동시에 분명히 요한복음 3장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세례(침례) 받을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는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말씀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표현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할 수 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그분이 사셨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마태복음 4장 1절 광야로 나가실 때 성령에 이끌리어 40일을 가서 계셨다.
어떤 분들이 성령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질문을 가끔 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아버지 안에 계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말씀한다. 어떤 분들은 그분이 인격체가 아니라고 말씀하는데 그 생각은 잘못 된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분이 분명한 개성을 가지신, 하나님과 똑같으신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거듭 이야기하고 있다.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심판하신 아버지 하나님 속에 계셨던 성령님, 또 그 희생을 당하시던, 자기를 제물로 바치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성령님, 십자가의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 우리 죄인들을 품에 안으시고 돌아가시던 그 세 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죽으심, 그 사랑의 이야기가 십자가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아니다. 분명히 세 분의 이야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특별히 히브리서 9장 14절 말씀을 다시 보면 거기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를 “영원하신 성령으로”라는 말씀으로 사용한다. 왜 성령님을 ‘영원하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가? 그것은 그 앞의 12절에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속죄의 영원성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의 성령을 다시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원한 해방이다. 이 성령님이 이 영원한 해방의 보증인이요 주인으로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중에 우리가 좀 자세히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란다. 영원하신 성령님, 영원한 속죄! 히브리서 9장에 나타나는 평행 절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그 구원에 대한 영원한 증인이요 보증인으로 성령님이 계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서 성령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실제로 불로 나타나신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영원한 불에 태우셨던 그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영원한 증인으로, 보증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똑같은 말씀 요한복음 16장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네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 자신을 다 주신 그 사랑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자로 나타났다. 영원히, 영원히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사야 6장으로 가본다. 이사야 6장은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만군’이란 히브리말은 실제 ‘군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만군’ ‘짜바’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군인, 군대를 가리킨다.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래서 전쟁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말씀한다. 이 전쟁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전쟁을 하셨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전쟁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에 들어가셨다. 자기 아들을 자기가 희생시킬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싸움,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십자가의 영광
예수님 자신도 역시 그러했다. 정말 영원히 자기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자기를 버리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영원히 맡기셨어야만 했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선악의 큰 싸움이기 전에 자기 자신으로의 싸움이셨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자로 나타나신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 영광이라는 단어가 나타는데 이 영광은 분명히 앞에서 불에 의해서 태워진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빛이다. 영광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태우셨던 그 불, 성령의 불이 하나님의 아들을 태우셨다는 사실을 빛으로 다시 세상 앞에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불에 타서 영원히 소멸되시던 그 희생의 빛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태우셔야만 했던 그 아픈 사랑의 결과, 희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영광이신 것이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영광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 정말 인간의 필설로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이사야의 성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거룩하다는 말씀을 세 번 반복하고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구별하여 바쳤다!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구별하여 바치셨다! 끝내는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한 불로 당신의 아들을 태우셔서 우리를 위하여 구별하여 바치셨다! 천사들이 그 놀라운 희생을, 아버지가 아들을 영원한 불에 태우시는 그 희생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부른 노래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는 이 성소의 불, 아들을 태우셨던 영원한 불이셨던 하나님, 영원한 불이셨던 성령님, 이사야 33장 14절에는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 세 분의 하나님들의 이름을 영영히 타는 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원한 불이라고 표현했다. 이 영원한 불이라는 말은 아가서 8장 6절, 7절에 남녀 간의 사랑의 불에 비유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같이 바람피운 외간 남자가 와서 잘못했다고 온 재산을, 집을 다 팔아서 갖다 줄지라도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이야기기라고 말했다. 그것을 여호와의 불에 비유했다. 그 불은 질투의 불, 사랑의 불은 홍수도 꺼뜨릴 수 없다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다.
성경구절
- 이사야 6장 3절
- 고린도전서 2장 10,11절
- 요한복음 3장 34절
- 히브리서 9장 14절
- 마태복음 4장 1절
- 히브리서 9장 14절
- 히브리서 9장 12절
- 요한복음 14장 16절
- 요한복음 16장 14절
- 이사야 6장
- 이사야 33장 14절
- 아가서 8장 6,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