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인 동시에 죄인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당시에 본인의 경험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요 동시에 죄인이라.” 로마 카톨릭의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의인이면 의인이고 죄인이면 죄인이지 어떻게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가? 흔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의인인데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루터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것을 정리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이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론이다.
1500년대인 16세기 중반에 카톨릭은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회 신학자들의 의견을 반박하고 잘못된 이야기라고 정죄하며 그 입장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공부할 때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겉모양을 덮어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죄의 본성 지체를 변화시키고 의인으로 만드는데 그게 참된 ‘의’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주장을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흔히 은혜가 들어왔다고 해서 주입된 은혜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데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의 의의 옷, 새 옷을 입혀 주었기 때문에 ‘입혀 주시는 의’를 주장하는 것에 반해, 로마 카톨릭은 아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의’다 라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며 그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서 7장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의의 본성, 사랑의 본성을 창조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공부했듯이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누스’ 즉 ‘이성’이라 한다.
우리의 판단력과 결정력인 ‘이성’(누스) 자체가 거듭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본성, 소위 육신이라고 말한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같이 상주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본성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흔히 우리가 표현할 때에 품성이 변화된다는 단어를 쓰는데 이 품성의 변화라는 단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속에 일어나는 죄의 본성의 변화, 이것이 좀 더 순화되고 정화되고 성화되는 경험, 이것을 품성의 변화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이 죄의 본성은 순화되고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치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속에서 우리의 죄는 죽었다. 사법적인 죽음이다. 법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래서 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곧 죄로 인해서 너는 죽어야 된다는 그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이 너는 죽어야 된다고 말했는데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분명히 죄 값을 갚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20절 말씀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말하기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한다.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육체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의 표현한대로 법적으로 이미 죽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 죄 값을 이미 치르신 예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에 의해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대가요,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맡기고, 그분이 해결하신 것을 믿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에베소서에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얘기하지만 고치는 대상이 아니다. 죄의 본성은 순화되고 성화될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 그 못된 성질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못된 성질은 아예 뿌리부터 뽑아서 없애야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오직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새 본성을, 새 유전자를 창조해 주기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죄와 함께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본성적 죄도 이미 지고 다 갚으시고 해결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명백히 말하고 있다. 죄가 되어 돌아가셨다. 죄와 함께 죽다고 말한다.
품성의 변화
그래서 이 ‘품성의 변화’라는 말은 새로운 본성, 새 영과 새 마음이라고 표현한 예수님과 같은 본능적 사랑의 본성이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원래 타고난 키만큼 자라나는 것을 흔히 말하기를 완전이라 말하고, 이 완전이라는 단어는 우리 번역에 가끔 성숙, 영어로 ‘mature’라는 말을 쓴다. 곧 끝까지 자라는 것이다. 1m 80cm가 내가 자랄 수 있는 키라면 거기까지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인데 이것을 성경은 완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매 단계에 있어서 세 살짜리, 열 살짜리, 혹은 스무 살짜리의 매 단계에 있어서의 완전도 완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라는 완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품성의 변화라는 말을 잘못 오해해서 옛 본성이 조금씩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
죄는 작든 크든 약하든 강하든 관계없이 그것은 뿌리째 죽어야 하는 것이다.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호랑이가 순하게 변한다고 고양이가 될 수 없다. 호랑이가 가지고 있는 그 성질, 그 야성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그 본성은 고양이나 호랑이나 같다. 쥐를 잡아먹느냐, 사슴을 잡아먹느냐, 똑같은 것이다. 그 본성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그 본성의 죄를 통째로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심장을 찢어 놓은 아픔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이 품성의 변화라는 단어는 사랑이 자라나는 과정인 것이다. 본능적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을 사랑하다가 조금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조금 있으면 온 인류를 품에 품는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소위 영적 진화론, 이 진화론은 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진화론이 있다.
죄의 본성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반쯤 변화 되어 반쪽은 예수님 같고 반쪽은 짐승 같고, 그래서 반쪽은 개털이 나 있고 반쪽은 예수님처럼 밝은 얼굴이고, 또 좀 더 성화가 되어서 얼마 지난 다음에는 70%는 예수님 같은데 아직도 30%는 개털이 박혀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또 조금 더 노력하면 90%는 예수님이고 10%는 개털이 박힌 개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단이 만들어 놓은 거짓말이다.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표현이다. 죄는 조금씩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어야 하고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거듭거듭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이다.
이 영적 진화론에 빠진 사람들이 꽤 있다. 그래서 사단에 속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던 창조를 부인하고,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 하는 것을 부인하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결코 변화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의롭게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진화를 통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죽하면 우리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을 하겠는가! 그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숨어있고 때로는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 이시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죄를 뿌리째 뽑아서 법적으로 영원히 없애셨다(히9:12). 재림 때에 죄의 존재를 우리에게서 영원히 없애실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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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로마서 7장 25절
- 골로새서 3장 3절
- 갈라디아서 2장 19절
- 골로새서 3장 5절
- 고린도후서 5장 21절
- 히브리서 9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