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종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본질, 종자가 바뀌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우리는 열매를 바꿔서 종자를 바꾸려고 하는 그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식 이하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인 어떤 선한 행위 그런 것들이 사람의 종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교육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교육 그것은 사람의 종자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이미 그런 종자가 되어있는 것을 조금 더 어떤 면에서는 그나마 좀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되도록 교육이나 훈련을 시킬 수는 있다.
일본의 교육은 참 대단하다.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된다. 식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음식도 정확히 자기 먹을 만큼만 덜어서 먹고 나머지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학교에 가 봐도 그렇다. 어떤 음악회를 하는 학교에 참석했는데 그 학생들이 밖에서 뛰어 놀 때는 정말로 자유분방하지만 일단 교실이나 강당에 들어설 때는 정말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볼 수 있다. 떠드는 것도 거의 볼 수 없다. 물론 모든 학교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의 일반적 교육 방법이 사람을 정말 반듯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본 종자가 바뀌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종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분명히 인간의 본성, 인간의 유전자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태복음 12장 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나무와 열매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34절에 너희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표현한다. 종자 자체가 독사종자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독사종자는 죽어야 하나님의 종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종자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열매를 맺힐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해서 사랑의 종자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종자로 거듭나야만, 다시 태어나야만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힐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그러시면서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악한 사람이 어떻게 선한 열매를 맺힐 수 있느냐? 씨는 악의 씨인데 어떻게 선한 열매를 맺힐 수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한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자연계 속에 나타난 진리를 우리는 간과해 버리고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속이고 기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차라리 천연계는 단순하다. 정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다.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는 것이 천연계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확실하다.
이런 선한 열매가 맺혀질 수 없는 상태, 악의 나무로 악의 종자로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런 종자로 존재하는 우리가 선한 말을 한다고 노력을 한다. 그것은 전부 악의 열매이다. 왜냐하면 근본 그 말의 동기나, 생각이나 행동의 동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죄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경건하게 보이고, 착하고 선하게 보이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한다. 속은 그렇지 않을 지라도.
예수님이 그렇게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믿음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많이 우셨다. 통곡을 하셨다. “회 칠한 무덤들아!”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 하실 때에 그 본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밖에 할 줄 몰랐던 그 본성이 죽어버리면서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행할 수 없는 종자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선하게 보이려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속은 욕심 있고 아깝고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많이도 아니고 조금 집어주면서 그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의롭다고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거듭났다 내가 이만큼 착하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를 포장하고 끝내는 그 포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선이라고 하는 개념이 자기를 포장하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다 들춰내시고 회 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부자들은 자기 가족이 죽으면 굴속에 묻고, 그 무덤을 잘 꾸며놓기 위해서 입구에 회를 발라 다른 것이 못 들어가게 하고 거기다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참 부잣집 묘구나, 훌륭한 분의 묘 인가보다 많이 배운 박사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회칠한 무덤이었다. 뚜껑을 열면 속에 송장이 썩는 냄새가 났다. 우리 속이, 우리의 마음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악의 씨가 죽고 하나님의 사랑의 씨로 다시 창조되지 않는 이상 우린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씨 곧 종자를 바꾸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 거듭난다, 다시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한다. 죽지 않으면 절대로 거듭날 수 없다. 거듭남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회개가 깊어지는 삶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이기심과 교만에 대해서 죽지 않고서 하나님의 사랑의 희생과 겸손의 유전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때로는 우리가 노력하면서 내가 이 정도면 예수님과 비슷하게 되었구나, 아, 내가 이만큼 회개했으니까 이제 다 회개한 것이다 하는데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개가 깊어지는 삶이다.
나의 일생을 통해서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도표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 다음에 아주 작은 죄밖에 안 보인다. 좀 더 지나면 좀 더 큰 것이 보이고 더 지나면 더 큰 것이 보인다. 계속 그러다가 나중에는 마지막 죄의 바닥에까지 내려온다. 죄 바닥에까지 내려온 상태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닥에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우리가 수없이 매 단계마다 자기가 다 죽었다 회개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또 다른 더 깊은 죄의 구렁텅이가 있다. 그래서 회개와 용서가 반복이 된다. 마지막 끝에 가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 18절에 말한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님을 만난 뒤로부터 그의 죄악의 본성의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그 자신은 오직 이기심,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는 신앙도 사랑도 구제도 다 자기를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다 든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이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의 그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이다. 우리도 모두 이 체험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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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태복음 12장 33~34절
- 로마서 7장 18절
- 빌립보서 3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