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배운 대로 거듭난 증거는 사랑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상태이고, 율법이 이루어진 상태이고 율법이 완성된 상태이다. 하나님의 형상도 사랑이고 율법도 사랑이며 하나님의 품성도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즉 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나 사랑의 성격을 판단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줄 오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을 하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슨 의미일까?
구약의 이사야 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는 말씀에서 보면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다. '믿음'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머리나 생각 속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고 히브리어 원어는 '맡기는' '행동'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헬라적 사고를 하고 있다. 헬라인들은 생각과 행동을 분리 시켰다. 상당히 분석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 근원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요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바치는 것'이 바로 ‘사랑’이므로 그 다음에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바친다'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히브리 원어상, 즉 성경상의 '사랑'이 아니다.
즉 내가 내 아내를 '사랑 한다‘라고 할 때는 나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주어지고 또 헌신과 희생이 되어지는 상태를 '사랑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헬라식으로, 우리 생각대로,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하고 성경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한 가지 방법, 독생자의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사망에 죄 값으로 내어주는 즉 바치는 행동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깨닫는 것, 이것은 거듭난 상태를 깨닫는 것의 중요한 열쇠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죄인인 우리 인간은 사랑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성경상 “사랑”,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고린도전서 13:4~7이다.
아가페 사랑이다. 다 바치는 것,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리고 이 사랑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3:1~3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했다. 아무 유익(헬라어: 오펠레오)이 없다는 의미는 “효험이 없다”, “무익하다”, “쓸데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시 103:13)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사 49:15)
부모 자식 간의 사랑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생각하면 성경상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눅 11:13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이란 말씀에서 보듯 비록 죄된 본성을 가진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주고, 조건 없이 헌신하고, 조건 없이 희생한다. 자식에게는 계산을 해서 행하거나 생각을 곰곰이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갈등, 고민을 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동이다. 모든 것을 주고, 헌신하고, 희생한다. 자식을 위해서 목숨까지 준다. 이것이 타락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창조해 주신 본성, 즉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이다.
그러나 그러했던 우리의 본성적, 본능적 사랑은 타락 후에는 이기적인 본성으로 바뀌어 다른 사람, 즉 이웃에게는 자식에게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웃 사람들 하물며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동료 그리스도인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자식에게처럼 무조건 주고 헌신하고 희생이 되지 않는다. 도움을 주어도 마음 깊숙이 들여다보면 “내가 목사이니까” “장로이니까” “권사이니까” “집사이니까”라는 체면과 계산적인 즉 조건적으로 도움을 주게 된다.
목적과 동기는 아닌데,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데 도와 준다. 어떤 사람은 남을 도우는 것을 아낌 없이 하지만 마음속 깊이 들어가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체면을 위하여, 자기 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내 이웃에게도, 남에게도 자기 자식에게처럼 조건 없이 주고, 헌신하고, 희생이 되는 상태가 성경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진리요, 빛이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논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성경상 구원 받은 상태, 거듭난 상태는 의지만 굴복하면 자기 자식에게 조건 없이 사랑이 되는 것처럼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되어지는 상태이다.
즉 거듭난 가장 강한 증거는 사랑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 하신다.(로마서 13:10)
성경구절
- 이사야 43장 4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로마서 8장 32절
- 요한일서 4장 8절
- 고린도전서 13장 4~7절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 요한일서 4장 7~8절
- 요한일서 3장 14절
- 시편 103편 13절
- 시편 49편 15절
- 누가복음 11장 13절
- 로마서 13장 8절
- 로마서 13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