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믿음에 대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 믿음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환자들을 고치실 때에 거의 매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를 구원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들을 구원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하셨는데, 이 말씀을 보면 구원의 공식이 나와 있습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선 우리가 주님께 맡기는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에는 당시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하루는 그의 아끼는 심복 하나가 큰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달려가 “내 하인이 몹시 괴로워한다.”고 말하며 병을 고쳐주실 것을 애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가서 고쳐 주리라.”고 채비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갑자기 “주여,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그분이 이제껏 하신 모든 병 고치는 능력을 보았고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을만한 수많은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 증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 있지만 그러나 이 증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 병을 고치시면서 보여주신 증거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하나의 밖으로 나타난 증거, 표적일 뿐이지 이 기적을 행하신 우리 주님 안에 계신 능력과 사랑, 바로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의지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 안에 계시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다. 명령하면 군사들은 순종한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만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 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감탄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요? 믿음은 단순하고 정직한 것입니다. 이 정직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경험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잠언에 여러 번 기록하신대로 우리의 생각이 우리 인생의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자유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방향을 돌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향하느냐 아니면 내 자신의 욕심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바뀌고 신앙이 바뀝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정직, 단순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인 마가.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은 유대인의 회당을 지어주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선을 베푼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는 이방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의 원수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유대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로마서 2:13-15 말씀에 양심에 기록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순종하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비록 타락하고 망가졌지만 성령께서 아직도 이방인들 중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들 중에 이렇게 정말로 마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중에 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수많은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대부분 부인하고 거절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그들 속에 있는 교만과 욕심 때문입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을 다시 한번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우리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바라봄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8절의 내용에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이 환자를 친구들이 들것에 들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의 지붕을 뚫고 내려주었습니다. 집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친구들이 지붕을 뜯을 정도면 정말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전혀 중풍병과는 상관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였다고 하자, 주변에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저 나쁜 사람 봐라, 저사람이 사람인데 감히 하나님처럼 죄를 용서하였다고 하나?’라고 쑥덕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중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권세가 있는 줄을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저 사람의 병의 원인은 죄다. 내가 죄를 용서해주면 저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보여준 믿음은 무엇일까요? 목숨을 걸고 지붕을 뚫어서라도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이 불쌍한 중풍병자가 붙든 것이 무엇일까요? 그분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질병의 원인인 죄가 사라지니까 죄로 죽은 육체가 소생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가복음 18장 1〜7절에는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가 등장합니다. 마을의 한 가난한 과부가 딱한 사정이 있었는데, 부자 법관에게 찾아가 읍소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돈 밖에 모르는 법관은 그녀의 억울한 일을 눈곱만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와서 간청하는 구나.’ 그는 과부의 말에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끈기를 갖고 날마다 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녀의 집요함에 지친 이 부자 법관은 결국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저 할머니 때문에 못살겠네. 이거 빨리 안 들어 주면 날 계속 괴롭힐 거 같구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6〜7절) 이처럼 믿음은 응답을 받을 때까지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행위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