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품으로 데리고 돌아가신다
성경은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에스겔 36장 24절)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스스로 갈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데리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겠다는 의미 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외침은 예수의 귀에 도달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들이 당신께 오도록 끌어당기십니다. 많은 사람은 이끌리는 것을 거절합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당신을 부르는 소리를 기쁨으로 듣고 목자이신 당신의 돌봄에 몸을 맡기려 하는 자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장 27절)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그리고 그 집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슬픔,마음의 소원을 훤히 보시고 아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종들에게 어느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의 어떤 집에 가서 나의 양 한 마리를 찾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한복음 10장 3,4절) 동방의 목자는 양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폭력이나 공포심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이 앞에 가며 양들을 부릅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으므로, 그 부르는 소리에 따릅니다. 구주이신 목자 예수도 이와 같이 당신의 양을 돌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편 77편 20절) 선지자를 통해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예레미야 31장 3절)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아무에게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호세아 11장 4절)
제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 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원한 보응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여정을 통해 나타난 구주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구주의 그 모습이 그들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정복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자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눈을 뜹니다. 그들은 예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그분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양들 앞서 가서 자신이 먼저 길의 위험을 만나듯이, 예수 또한 당신의 백성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한복음 10장 4절) 하늘로 가는 길은 구주의 발자국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길은 험하고 바위투성이일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의 발은 끔찍한 가시를 내리밟아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가기 쉽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도록 요구 받은 어떠한 짐도 친히 지셨습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 자상한 성품은 조금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이 따뜻한 동정으로 가득 찬 예수의 마음은 인류의 모든 고뇌에 열려 있습니다. 찔린 손은 세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고자 오늘도 내밀어져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장 28절) 그리스도께 헌신한 영혼은 그리스도의 눈에 온 세상보다도 소중합니다. 구주께서는 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갈보리의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위해 돌아가신 한 영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예수를 떠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예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십니다. 이것이 일관된 성경의 보증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시련의 때도 결코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으신 도움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유혹에 저항하고 악과 싸우다가 마침내 무거운 짐과 슬픔에 압도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인간의 눈에 숨겨져 있지만, 믿음의 귀는 예수님의 음성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이사야 41장 10절;한글킹제임스성경)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요한계시록 1:18;한글킹제임스성경) 나는 너의 슬픔을 견뎠고 너의 고난을 경험했으며 너의 유혹을 만났다. 나는 너의 눈물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울었다.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려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나는 알고 있다. 너는, 자신이 고독하게 버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의 고통을 심금(心琴)으로 느껴 주는 사람이 이 땅에 없을지라도,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살아라.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장 10절)
목자가 자신의 양을 아무리 사랑할지라도, 역시 자신의 아들딸들을 더욱 사랑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목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한복음 10장 14, 15절)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하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 하나님께서 "내 짝된 자"(스가랴 13장 7절) 라고 선언하신 분, 그분과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스도와 지상의 자녀들과의 교제로 묘사하시다니! 여러분! 예수님께 돌아가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목자에게 잘못 인도 받은 세계 도처에 있는 영혼에게 마음을 끝까지 기울이십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목장의 양으로 모으려 열망하신 사람들이 늑대 사이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한복음 10장 16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한복음 10장 17절) 이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당신을 구속하려고 생명을 바친 나를 더욱 사랑해주신다. 나의 생명을 바쳐 당신의 부채와 당신의 죄과를 가져가 당신의 대리인과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사랑받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한복음 10장 17, 18절) 예수께서는 인류 가족의 일원으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샘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그 주권하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생명을 가져오고 영원한 생명에 불을 지피려고 자원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세상의 죄를 지고 죄의 저주를 견디며 당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장4∼6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장 22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다는 말은 ‘죄를 완전히 없앴다’, 즉 죄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개’라는 의미입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는 5장 ‘성경이 말하는 회개’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grace)’라는 단어가 범죄 후에 생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은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이미 죄 이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디모데후서 1장 9절)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이미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흠정역 영어성경에서는 ‘시간이 시작하기 전’(NKJV)이라고 번역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졌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라는 단어는 분명히 범죄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용서는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용서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창조, 세 번째가 타락, 네 번째가 회개, 그리고 다섯 번째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혹자는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용서하리라"라고 왜 미래시제로 기록되었는지 묻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장과 죄인의 입장의 차이입니다. 이사야 44장 2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으로 기술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셨으되 조건 없이 하셨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 후서 1장 9절의 말씀대로 "영원 전부터" 미래를 이미 다 아시고 미리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의 품성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입장은 다릅니다. 죄인은 이사야 55장 7절의 말씀처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바로 ‘죄를 버리라’, 즉 ‘죄를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면 ‘용서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조건절(if)을 써서 미래시제로 말씀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습관적인 죄를 맡겨버리고 알려진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인을 의롭게 여기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도 알고 있는 죄를 그대로 행하거나 알고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칭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완전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 죄를 버리고 맡기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야 합니다. 죄를 맡기는 일은 9장 '승리의 공식'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은 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죄가 훨씬 더 좋기 때문에 죄를 버리거나 맡길 생각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죄인이라 할지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면 놓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을 통하여 더 좋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하면 자연스럽게 모든 죄를 맡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맛보면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께 죄를 맡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로마서 2장 4절)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용서하시고 주신 용서는 죄인이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맡길 때 진정 본인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회개도 안했는데 용서를 하나님이 해 주셨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주셨다고요? 회개해야 용서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겠지만,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입장으로는 죄를 맡기고 이미 주신 용서를 받는 교환 조건입니다. 문제는 죄인이 예수님께 죄를 맡기고 주신 용서를 받느냐 아니면 끝까지 예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 죄를 움켜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를 받느냐 거절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양이 자기 발로 집에 돌아간 게 아니고 목자가 등에 업고 돌아간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용서의 어깨 위에 메시고 우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찾으신 다음에 우리를 어깨 위에 메고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몫은 찾으러오신 예수님께 죄 뿐 아니라 우리자신을 통째로 맡기는 것입니다. 믿고 동의하고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예수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실 때 아버지의 용서의 품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