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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인간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이성이 아닌 은혜”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흥미로운 단어가 로마서 7장 25절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에 쓰인 ‘마음’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쓰는 ‘마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카르디아(καρδία)’인데, 본문에는 그 대신 ‘누스(νοῦς)’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카르디아’는 해부학적으로 사람의 ‘심장(heart)’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카르디아’를 쓰지 않고 대신 ‘누스’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누스’는 우리말로 ‘이성(reason)’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이 ‘누스’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뇌와 같고 비행기나 자동차로 말하면 운전대와 같습니다. 정신세계를 움직이는 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가끔은 히브리어로 ‘영’을 뜻하는 ‘루아흐(רוּחַ)’라는 단어가 이 ‘누스’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예가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로마서에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에서 우리말은 앞에도 ‘마음’, 뒤에도 ‘마음’이지만 헬라어 말씀 원어를 보면 앞에 나오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의 ‘마음’은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는 단어로 ‘지식’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가면 다시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사”의 ‘마음’은 ‘이성’을 뜻하는 ‘누스’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뭉뚱그려 ‘마음’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실은 전혀 다른 단어인 것입니다.
문제는 뒤에 등장하는 이 ‘마음’의 본래 의미인 ‘이성’이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는 운전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동일한 단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마서 12장 2절) 여기에 쓰인 ‘마음’이라는 단어 역시 ‘이성’을 뜻하는 ‘누스’입니다. 이 이성은 분명히 주님 안에서 거듭남을 통해 새롭게 창조된 이성을 가리킵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창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이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즉 사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건전한 이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할 때 그 사랑에 마음을 맡길 수 있는 판단력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차가 박살이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특히 찌그러진 차 안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다 죽어가는 사람은 긴급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전기톱으로 차체를 잘라서 꺼내어 구급차에 옮기기 전에 병원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실 때에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움직이십니다. 실제로 몸이 다 부서진 중환자를 병원에 옮기는 것은 119 구급대원들이 할일이지만 당사자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현장에서 끝내겠다고 선택하면 그곳에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하신 의지로 죽음의 문턱에 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기다리신다 해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앰뷸런스에 우리를 실으실 수 없습니다.
성경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만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일례로 유다서 1장 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우리말 번역은 “믿음의 도”라고 했는데 원문에 ‘도(道)’라는 말은 없습니다. 헬라어로 ‘피스티스(πίστις)’라는 단어, 그냥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행전 17장 31절) 이 말씀에서도 역시 ‘믿을 만한 증거’라고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단지 ‘피스티스’, 즉 ‘믿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후서 1장 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주신 동일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 자체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등에 업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실 업히는 것 역시 내가 업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는 주님께서 우리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잡아 주님 등에 업으시도록 우리가 허락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업어 주셔서 우리가 업힐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 16절) 오늘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업으실 수 있도록 가만히 그분의 등에 몸을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예수님의 등에 업혀 하늘까지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7장 25절
- 로마서 1장 28절
- 유다서 1장 3절
- 베드로후서 1장 1절
- 요한복음 15장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