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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의를 받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
저번 시간 내용을 다시 복습해 봅시다. 에스겔 36장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 분명한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까?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 영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 ‘성령’의 본래 말은 ‘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영’ 앞에 ‘성’자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물과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이제부터는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결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옛날보다도 더 못한 상태로 타락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 새 영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새 영이 마음속에 들어가서 성령으로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이 신약성경 로마서 8장 2〜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 안에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한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때문입니다. 여기 분명히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여기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의 육신은 죄된 본성을 가리키며, 죄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로 성경은 ‘육신’으로 표현된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이 죄라는 사실과 그 타고난 육신의 본성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육신(죄의 본성)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장 4절)고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의 요구’는 ‘디카이오마’, 즉 율법을 지켜서 이루어진 의를 가리킵니다.
이 똑같은 구조로 된 말이 에스겔 36장 27절이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행한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있다. ‘행하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할라크(הָלַךְ)’인데, 이 말은 원래 ‘걷다(walk)’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본문에는 우리가 율례를 ‘행(行)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상대에게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는 의미의 ‘에네르게오(ενεργεω)’라는 동사와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 국면은 ‘입혀 주시는 의’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만들어 나누어 주시는 의, 즉 ‘나누어 주시는 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맡겼을 때 주님께서 우리 밖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 분이 의를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을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구절
- 에스겔 36장 27절
- 요한복음 3장 5절
- 로마서 8장 2〜4절
- 빌립보서 2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