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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하신 성령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겠습니다. 구원의 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재창조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다시 만드셔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성령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이 하나됨을 성경은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언약은 히브리어로 ‘브리트(בְּרִית)’라고 합니다. ‘브리트’는 한 덩어리로 뭉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는 ‘디아테케(διαθήκη)’, 라틴어로는 ‘테스타멘툼(testamentum)’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디아테케’는 ‘공간을 가로지른다’는 의미를, ‘테스타멘툼’은 ‘유언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커버넌트(covenant)’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계약 당사자가 ‘함께(co-)’ ‘온다(veni)’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쪼개서 땅에 널어놓고 그 사이를 성령의 불이 지나감으로 양자 간 맺은 언약의 효력이 시작되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브리트 안에는 이렇듯 창조의 회복이 담겨 있습니다. 언약을 통해 죄가 용서되고 다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대체 ‘영광’과 ‘성령’은 어떠한 함수관계가 있을까요?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말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두고 종종 ‘영광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영광은 요한복음 12장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바로 이어 언급하신 것이 밀알의 비유였습니다. 결국 인자가 얻을 영광이란 십자가에서 죽는 희생을 의미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휘황찬란한 왕관이나 자주색 용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자신이 가지신 모든 것들을 다 주지 않으시면 견딜 수 없는 본능적 사랑, 그 사랑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스스로 죽게 만든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그분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한복음 12장 27절)고 외치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2장 28절) 히브리어로 ‘영광’이라는 단어는 ‘많다’ ‘무겁다’는 뜻을 가진 ‘카보드(כָּבוֹד)’입니다. ‘카보드’는 흔히 ‘재산’으로도 번역되는데, ‘많은 것’, 그래서 ‘무거운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재산’도 가리킬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이미 하늘에 큰 영광이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장 13절) 죄인을 위하여 제물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아들 자체가 아버지 하나님께는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또한 아들에게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지고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가복음 14장 27〜28절) 이 예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듬뿍 느껴집니다.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아시고도 그들을 용서하시겠다는 보증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나서 먼저 갈릴리로 가서 너희들을 기다릴게.”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신 약속은 이미 용서하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61〜62절에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배신하던 순간, 주님께서 그를 돌아보시는 눈에서 못난 제자 베드로는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보았습니다. 몇 시간 전 주님께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시던 겟세마네 동산까지 한달음에 내달려서 그대로 엎어져 베드로는 대성통곡했습니다. 그의 교만과 이기심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활하시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장 19절)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에 바빴던 제자들에게 따끔하게 혼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평강과 안부를 먼저 묻습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는 ‘샬롬(שָׁלוֹם)’,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라고 합니다. 이 안부는 죄의 빚을 다 갚았다는 영수증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다 지불했다. 그러니 안심해라.”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에 다시 회복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은 이렇게 용서받은 제자들에게 내린 것이었습니다.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피는 그들을 용서하신 보혈이고 물은 그들을 새롭게 하신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십자가 이후 용서를 경험한 제자들은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 성경은 ‘이른비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른비 성령은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선물입니다. 진심으로 교만과 이기심, 자기 사랑 등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성령은 결코 우리 가운데 오실 수 없습니다.
십자가 이전에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장 16〜17절) 장차 십자가 이후 너희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다음 성령이 너희 속에 ‘계실’ 것이다. 동사가 미래형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께서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지 못하고 아직 옆에 머물러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성령을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을 다음 시간에 더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성령을 이른비처럼 받는 경험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7장 39절
- 요한복음 12장 23절
- 요한복음 12장 27절
- 요한복음 12장 28절
- 누가복음 2장 13절
- 마가복음 14장 27〜28절
- 누가복음 22장 61〜62절
- 요한복음 20장 19절
- 요한복음 14장 16〜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