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속에 있는 죄의 욕망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기도하라 하신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3절 말씀이다. 이 기도는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야고보서 1장 13절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치 않으시고 시험 받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욕망 때문이다. 죄에 대한 우리 욕심이 죄를 짓게 만든다.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시험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사단이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 본성과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이 죄의 본성은 어찌할 수 없다.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본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길은 없다. 물려받은 죄의 본성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죄의 본성이 만들어낸 우리의 연약함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조상이 범죄 하면서 남겨준 유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알러지를 앓고 계신 분들이 면역력이 강해지면 자동적으로 알러지가 없어진다고 한다. 몸이 약하니까 신경질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두드러기가 난다. 그런데 몸이 강해지면, 면역력이 강해지면 다른 물질이 들어와도, 어떠한 다른 이물질들이 들어와도 잘 견뎌내고 소화시켜 낸다. 마찬가지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무엇도 말 그대로 막을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 사람들에게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이는데 스가랴 3장 1절로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반역해서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때에 그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새로 건축하고 예루살렘을 건축하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 앞에 보여진 대제사장의 모습은 정말로 더럽고 추한 남루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이다. 곧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옷을 벗기고 새 옷,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마귀가 옆에 서서 계속 공격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을 받고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아도 싼 사람이다. 정말로 너무나 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죄악의 옷을 벗기시고 의의, 용서의 아름다운 옷을 입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아버지이셨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잘못해서 시험과 어려움 중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건져 내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보여 주시고 계신다. 때로 우리가 너무 큰 시련을 당해서 가슴이 아프고 상처가 크고 깊이 낙심해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엘리야가 그러했다. 엘리야는 죽기를 원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일을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먹기를 거절하고 그는 광야로 도망을 가서 엎드린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먹고 마시라 일어나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한다. 엘리야를 깨우시고 먹이시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드디어 시내산, 호렙산에 이른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다. 아담에게 똑같이 했던 말씀이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묻는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엘리야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 갔다. 그리고 엘리야를 다시 부활시킨다. 그리고 새 사명을 주신다.
엘리야는 그 광야에서 거듭나는 경험을 하고 놀랍게도 에녹처럼 엘리야는 산채로 불 병거,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놀라운 영광을 누린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출애굽의 엄청난 역사에 도구가 된 모세는 죽어서 부활에서 데리고 가셨는데 모세 보다 더 연약하여 거꾸러진 이 엘리야는 어떻게 산 채로 데리고 가셨을까? 에녹처럼 실수하지 않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해서 산 채로 데려 가셨는데 엘리야를 왜 그렇게 하셨을까? 오랫동안 나는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에녹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다. 에녹을 하나님께서 산채로 데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에녹의 그 간절함, 곧 그의 믿음이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아마도 므두셀라 그 어린 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거의 매일 매 순간 아빠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던 그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쳐다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에녹도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이 된다. 엘리야도 역시 그랬다. 하나님을 향한 그 간절함이 누구보다 말 그대로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죄인이다.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이다. 똑같이 넘어지고 똑같이 시험에 빠졌다 하지만 엘리야를 산 채로 데려가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 크다고 생각이 된다.
시험 당함을 허락하시는 이유
여러분,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하나님은 ’미쁘사’ 여기 다시 그 말이 나타난다. 미쁨, 믿음이라는 말이다. 확실히 약속을 지키셔서 절대로 변하지 않으셔서, 미쁘사 우리가 시험 당함을 허락 하셨는데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씀은 시험에 떨어지지 않기를 구한 것이 아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곤두박질을 해서 수렁에 빠지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시험 받을 즈음에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왜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가?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볼 것이 결코 아니다. 시험에 들지라도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와 좀 더 가까이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게 하시기 위한 은혜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라고 하셨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 줄테니까 나한테 말하라 틀림없이 내가 이 약속은 지킨다.
시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다. 죄는 거듭 말씀드리면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 대신 이웃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라는 시험에 빠진다. 자기라는 웅덩이에 빠진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실망과 걱정과 근심과 낙심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지만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네가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는 우리 주님의 보증의 약속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단은 우리와 우리 주님 사이에 사랑의 고리를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하나님께서 붙드셨던 손을 우리 스스로 놓게만 할 수 있다면 사단은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이 계속해서 우리를 시험하고 공격하는 이유는 우리 믿음의 손을, 우리 아버지를 붙든 믿음의 손을 놓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그래서 네가 돌이킨 후에 너와 같이 시련당하고 어려움 당한 이들을 위해서 네가 그들을 더욱 굳게 믿음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서게 하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여러분, 우리 아버지가 넉넉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시험에서 보호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끔 시험에 들게 허락 하시는 것은 그 시련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 우리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다. 결코 우리 아버지는 우리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게 되길 바란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6장 13절
- 야고보서 1장 13절
- 스가랴 3장 1절로 4절
-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