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김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한글 말 가운데 한자로 된 말이 많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도 사실 한자인데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긍휼이 뭐냐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순수한 우리 한국말로 하면 ‘불쌍히 여기는 자는’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mercy’ ‘자비’라고 번역되어있다.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
나는 이 단어를 ‘동정’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다. 왜냐하면 이 동정이라는 말은 같을 ‘동’, 느낄 ‘정’자이다. 동정, 같은 마음을 같이 느낀다, 같은 마음을 가진다. 슬퍼하는 자의 슬픔이 내 가슴에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 배우들이 정말로 명연기를 한다. 할 때는 그 대본 중에, 그 시나리오 중에 나와 있는 그 인물과 똑같은 마음을 가질 때 제대로 표현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소위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감정이입이라고 말한다. 그 감정이 이사를 와서 내 속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똑같은 느낌이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동정, 감정을 똑같이 가지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긍휼히, 불쌍히 여기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사람과 똑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다는 표현은 아마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느끼고 경험하는, 같지는 않지만 거의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특별히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과 동정, 그것은 본능적이라고 계속 표현하지만 이 본능적이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말하면 유전자가 같을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유전자가 동일 할 때는, 엄마의 유전자와 딸의 유전자가 같을 때는 딸의 아픔을 엄마가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딸이 시집을 가서 시댁이나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날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엄마는 그 딸과 같은 마음으로 느낀다. 왜냐? 마음이, 유전자가, 종자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에게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엄마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신다. 우리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비 와 용서와 불쌍히 여기는 정신을 나타날 때는 혼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자비의 근원이신 하나님
여러분, 만일 남북이 통일이 되면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경제적인 차이 때문도 아니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가장 큰 차이, 그것은 도덕적 차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공산주의가 도덕을 가르치는 일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남의 것을 강탈해 올 수도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거짓말도 할 수 있다.
과거 우리 한국 교회의 거성이셨던 김 진홍목사님이 두레 마을의 창시자이시다. 그분이 탈북 한 젊은이들을 데리고 불쌍해서 전국 여행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거의 확실할 줄 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구경을 시킨 그분은 참 마음이 따뜻한 분이다. 식당에서 밥을 다 먹이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빵을 사서 그것을 놓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밥은 먹였지만 안 먹어 본 빵이니까 조금 사서 놓고 축복기도를 하시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면 가장 빠른 동작을 하는 친구가 가장 많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아멘이 끝나자마자, 더욱 놀라운 사실은 먹지도 못하는데 부지런히 가방 속에다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배가 고파도 도덕심은 있어야 되는데 도덕이 없는 것이다. 많이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양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세상에서는 그렇게 썩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결론은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윤리를 배운 것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하시지 않는 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모든 사랑의 근원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그분의 이름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그분은 우리의 가치에 따라서 우리를 취급하지 아니하신다. 가치가 없는 인간은 값을 매겨서 값어치를 집어넣으셔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값있게 만드셔서, 당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존재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값이 없는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을 당신의 피 값으로 엄청난 무한한 값을 가진 존재로 만드셔서 사랑하신다.
그 분은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서 엄격함을 보이시는 것도 그 엄격함을 통해서 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몸짓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주시기를 심히 갈망 하시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사랑처럼 누가복음 11장 13절은 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계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죄를 영원히 태우는 영원한 불
하나님의 사랑을 예레미야 31장 3절에 영원한,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랑은 그치지 않는다.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분명히 말씀하지만 아가서 8장 6, 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투의 사랑,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죽이는 그 죄들을 영원히 태우시는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은 우리의 구원에 근원이다. 우리를 영원히, 영원히 긍휼히 여기시는 그 사랑의 불은 결단코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33장 14절에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말하기를 영영히 타는 불, 영원한 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영원한 불은 우리를 영원히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가 죽게 되었고 상처를 입었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무엇을 팔아서라도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고난과 죽음에서 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동정과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다. 누가 시켜서? 아니다. 교육받아서? 아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유전자가 발동한 결과이다.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 사랑의 불은 영원히, 그 동정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영원히, 그 동정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랑, 그 영원한 사랑 어떤 것도 꺼뜨릴 수 없는 그 사랑의 불을 받지 않는 이상 결단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동정할 수 없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7절
- 요한일서 4장 19절
- 출애굽기 34장 6절
- 누가복음 11장 13절
- 예레미야 31장 3절
- 아가서 8장 6,7절
- 이사야서 33장 14절
- 고린도전서 13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