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통의 무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드시는 음식을 먼저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이 제물들은 다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름, 예수님의 두 콩팥 그리고 쓸개와 그분이 흘리신 피가 하나님 앞에 불 태워진바 되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가름과 콩팥과 쓸개와 피를 태운 냄새를 음식으로 드신다.
겟세마네 동산,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틀이라는 뜻이다.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이다.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산이 소위 감람산이다. ‘감람’이란 ‘올리브’의 한국말이다. 그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는 하단에 올리브 열매를 따서 끌고 내려오거나 굴려서 겟세마네에서 기름을 짜는 것이다.
이 ‘기름틀’이라는 말이 ‘겟세마네’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흐르더라” 이것은 주님의 무한한 정신적 고통, 우리의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는 그리고 본인이 죽어도 싫은 그 죄를 저항하는 그 저항, 그리고 그것을 다 뒤집어쓰신 그분의 마음의 고통, 죄를 싫어하는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의 고통이 예수님을 정말로 샌드위치처럼 기름을 짜고 있었다.
그 정신적, 죄의식의 고통의 결과로 육체가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 몸 안에 남아 있던 모든 기름, 레위기 3장에 나타난 기름은 짐승을 잡았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기름을 떼어내어 태운 것처럼 주님께서 몸에 가지고 계셨던 모든 진액이 다 말라버린 것을 말씀한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죄의식의 고통이었다. 우리의 죄악의 뿌리까지 다 가져가셔서 죄가 되신 주님의 고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하신 그 죄의 무시무시한 고통. 특별히 우리가 죄를 알지 못하는, 너무 죄에 익숙해서 알지 못하는 그 죄를 예수님은 느끼셨고 짊어지셨기에 그 고통은 더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당하신 정신적 고통의 끝의 결과가 심장이 터진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속을 썩이면 가슴이 아프다.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과 심한모욕을 당할 때 우리가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아픈 것을 느낀다. 가슴이 아프고 말지만 예수님은 심장이, 가슴이 터져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죄인의 죄가 옮겨졌을 뿐 아니라 그 죄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아셨기 때문에, 죄의 실체를 아시는 그분이 당하신 고통은 누구도 형언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시고 광야에 계실 때에, 그가 첫 번째로 당한 도전은 바로 식욕에 대한 도전이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먹는 것을 못 참아서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죄악의 뿌리에 식욕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말로 ‘식탐’이라고 한다, 식욕, 먹고 싶은 탐심. 그것이 우리 죄악의 뿌리 가운데 있다.사단이 유혹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모든 것 다 줄 테니까 내 앞에 절하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 그가 가진 자존심, 혹은 명예욕, 그것들의 뿌리가 바로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 육체가 40일을 금식해서 거의 탈진해서 죽어가는 입장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인간이 타락한 그 죄의 실체를 만난 고통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를 지고 이제는 죽임을 당하시는, 형벌을 당하시는 그분의 고통은 우리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몸 안의 모든 기름이 다 타버린 것이다.
몸 안의 모든 진액이 다 말라비틀어진 저 시장의 마른 명태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죄의식,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진노와 하나님의 저주를 느끼면서 몸의 기름은 다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화목제는 상번제 위에다 드린다. 그냥 아무데나 드리는 것이 아니다. 화목제의 고기는 다 먹고 나머지 태우는 부분들은 상 번제물 위에 올려놓았다. 상번제는 아침 9시에 제사를 드리면 오후 3시까지 가는 그 제사이다. 레위기 3장 5절, “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것은 상번제가 분명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시간, 아침 상번제를 드리는 그 시간이 오전 9시였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그것이 천천히 불에 탔다. 그것이 다 태워지는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오전 9시이고 완전히 타서 재가 되는 시간이 오후 3시이다. 그래서 다시 저녁 제사를 드린다.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
주님께서 이 번제물 위에 화목제로서 그가 받은 정신적 고난이 그의 몸의 기름을 다 태웠다. 그 몸에서 정신적 고통에 의해서 나타난 그 독소들이 신장을 다 파괴했다. 사구체가 다 녹아서 피 물이 되어 방광으로 내려갔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 정신적 고통으로 신장이 망가져서 신장이 녹아내려서 소변으로 피가 나오는 분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채찍에 맞아서 온 몸이 다 찢겨지셨지만 그뿐만이 아니고, 그분의 육체적 고난만이 아니고, 우리의 죄로 인한, 우리의 죄의 본성으로 인한 그분의 정신적 고통이 그분의 몸 안에 있는 기름을 다 태워버리고, 진액을 태워버리고 끝내는 그 결과로 신장이 다 녹아내리고 쓸개가 녹아내린 그런 무지막지한 정신적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고난을 마시고 먹었다. 불에 태운 냄새를 맡으면서 아들의 무지막지한 고난을, 그 기름이 타들어가는 고난을 주님은 받아서 드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내 아들이, 혹은 내 딸이 그렇게 태워져서 난도질을 당하고 속이 다 녹아내려 죽어간다면 그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 기록은 예수님을 매달았던 십자가 주변이 낮 12시부터 그가 운명하시던 시간까지 캄캄함으로, 흑암으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감추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이상 그 아들을 보실 수가 없어서, 그 아들을 영원한 불로 태우시면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셨을 때에 주님은 하나님을 부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예수님이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실 때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자 못함이니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의 심장이 갈라지는 마지막 그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 그는 사람으로서 죄인을 대신한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신다. 그때는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아버지가 아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당하시는 분으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운명하신다. 그는 죄인이 아니다. 의인으로서 죄인의 죄를 뒤집어쓰셔서 한 사람으로서, 인자로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서 ‘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 이 고난의 결과를 우리 아버지께서 다 드시고, 우리를 저주하지 않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영원한 저주의 불로 태우시면서 그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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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누가복음 22장 44절
- 레위기 3장
- 고린도후서 5장 21절
- 레위기 3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