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성소는 원래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
요한계시록 1장 4절에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라고 말씀하셨는데 ‘장차 오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 다음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라고 했는데 이 지상성소인 광야성소에서 일곱 개의 등잔이 있었고 거기에 일곱 개의 불이 있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다. 이것은 순금으로 만든다. 다른 것과 다르다. 금은 하나님의 왕권을 나타낸다. 그런데 다른 어떤 도구와는 달리 이것만 순금으로 만든다. 물론 그룹천사는 천사로서의 모습을 나타냈겠지만 하나님 앞에 순금등잔, 이것은 성령이라고 요한계시록 1장 4절에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솔로몬성전에 가면 이 모형이 달라진다. 솔로몬 성전에는 함께 붙어있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12절로 18절을 보시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성소에 계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실제로 예수님이 세마포 옷을 입고 계시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때에 예수님의 옷이 세마포 옷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존재로 계시지만 그분의 몸에서 빛이 나오는 하나의 순결, 죄 없음의 빛이 나오는 모양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는 것처럼 앞의 광야에서 보여주신 붙어있는 순금 촛대가 아니고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촛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촛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다. 이런 지상성소에서의 모습은 자주 바뀐다. 성소의 원형이 있는데 원형을 시간마다, 시대마다, 장소마다 바꾸어서 표현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의 기구들은 광야성소의 기구와 또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이야기는, 하늘의 성령이라든지 천사들이라든지 실체는 있지만 모형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물론 계시록 5장에 보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오, 그런 괴물이 어디에 있는가? 모형들이다. 그런데 실체, 적어도 예수님이라는 실체는 분명히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실체, 그분 하나만은 정확하게 드러난 실체이다.
하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이신데 알 수가 없다, 볼 수가 없다. 천사들도 정확한 실체를 우리가 볼 수가 없다. 영이기 때문이다. 모양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 무덤에 왔던 하늘 천사들은 모양이 번개 빛 같더라고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의 모양으로도 나타난다. 우리가 이 모형들을 통해서 실체를 추측하는 것뿐이다.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형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무슨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으셨는지를 읽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성소의 기구들을 생각해야 될 중요한 이유이다. 어차피 성소는 하나님의 마음을 펼쳐놓은 곳이다.
하나님의 아픈 가슴이 성소
우리가 지난 시간들 속에서 공부했지만 죄가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가슴에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의 피를 흘려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아픈 가슴이 성소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 22절,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은 분명히 우리 아버지 자신이시고, 예수님 자신이시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 등등에 나타난 성소의 모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형성소이다. 실체는 우리가 볼 수 없다. 하늘에 가서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것은, 어떤 분들은 성소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볼 수 없고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모형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만 보면 된다, 결국은 성소 자체가 하늘에 없다, 하나님만 계신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러나 아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계시고, 성소에서 하시는 일들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일들이 계속 되고 있다. 그래서 성소가 없다는 말은 잘못하면 오해될 수 있고 곡해될 수 있는 말이다. 여기 분명히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영적으로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서 우리가 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또 히브리서 9장 11, 1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1절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장막이” 하늘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 공간 속에 계시는 것이다.
못 박힌 손을 분명히 드신다. 하늘에 더 크고 완전한 장막이 있다. 다니엘 7장 9, 10절에 보면 하나님 보좌 앞에 서있는 천천만만 천사들이 있다. 거기에는 숫자를 그대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만만이면 적어도 1억이다. 실제 천사의 수가 1억 보다 많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억이라는 천사들이 있을 공간을 상상해 보라. 이 세상의 어떤 운동 경기장도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 있는가? 일억이면 엄청난 숫자이다. 그 천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상상해 보라! 성소의 그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이 큰 공간이다. 거기에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거기에 서 계신다. 우리를 위하여 서 계신 것이다. 손을 드시고 서계신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이 거기에 계신다. 이 성소가 얼마나 큰지는 우리가 하늘에 가봐야 알 것이다. 무한한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죄가, 속죄가 끝나고 우리의 죄가 더 이상 용서할 죄가 없어지고 죄가 말소된 다음에는 그러한 피 뿌리는 성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우리의 성소가 되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품에 안길 것이다. 어떤 분들은 하늘에 가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실제로 한 번 안겨보고 싶다는 분들이 계신다. 예수님 품은 안길 수 있는 품이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탕자를 안아주신 아버지가 우리도 안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품에 확실히 안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것이다. 여러분, 우리와 같이 계시는 성소가 되시는 예수님, 우리의 영원한 성소가 되실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가서 우리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육신의 부모에게 감사를 드리겠는가! 우리가 서로를 껴안을 것이다. 그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성소이시다. 그 영원한 성소에 저와 여러분이 영원히 그 성소 안에 안겨서 사시는 은혜를 누리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태그:성소,지상 성소,솔로몬 성전,대 제사장,촛대,죄,성전,속죄
성경구절
- 요한계시록 1장 4절
- 요한계시록 1장 12절로 18절
- 요한계시록 5장
- 요한계시록 21장 22절
- 히브리서 10장 19절
- 히브리서 9장 11절로 12절
- 다니엘 7장 9절로 10절
- 누가복음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