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같은 성령의 또 다른 의미
마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본다. “예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과 성령,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마태복음 3장 16절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둘기 같은 성령, 사람들이 흔히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노아 홍수 당시에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던 새 중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곧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더라. 이제 나무가 나올 만큼 드디어 물이 내려갔구나, 그 뒤로부터 희망과 평화의 상징으로 불렀지만, 예수님에게 임하셨던 이 성령, 비둘기 같은 성령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예수님의 세례(침례)식은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를 바치는 약속을 하는 서원 예식이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세례(침례)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 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시는 서원 예식으로 세례(침례)를 받으셨다.
이 제물로 바쳐지는 비둘기, 과연 제물로 나타난 비둘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성소를 배울 때 자세히 배울 것이다. 레위기 1장 14절 이하에, 비둘기 제사가 나온다.
특별히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가 없을 때는 산비둘기를 잡아 오는데 산비둘기는 정말로 가난한 자의 것이다. 새 그물을 치고 콩이나 혹은 옥수수를 파먹으려고 달려드는, 그물에 걸린 비둘기를 잡아다가 제사를 드린다. 그래서 흔히 이 비둘기 제사를 말할 때는 무소유자의 제사라고 한다. 무소유의 제사,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의 제사이다. 돈을 주고 양을 사고 소를 사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냥 거저 얻은, 아무것도 없는 자가 하나님께 드릴 때에 드리는 제물이다.
이 비둘기 제사는 아주 흥미롭다. 이제 나중에 그것은 제사를 공부할 때 따로 공부하기로 한다. 어쨌든 여기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신다. 그 말씀은 그가 완전히 자기를 다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에게 다 주셔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자로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한다. 무소유자의 희생제물이다.
무소유자임과 동시에 소유자
성경에 말씀하고 있듯이 그가 본래 가난한 자가 아니다. 이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온 우주와 함께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다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되었다. 마지막 입으셨던 옷도 벗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자기 몸에 있던 피도 물도 다 쏟아 주셨다. 무소유자이다. 다 주신 자이다.
한국에 소위 ‘무소유’라는 책을 쓰신 법정 스님도 돌아가실 때 본인이 입으셨던 적삼하고 신고 다니셨던 신발 놓아두고 가셨다고 한다. 무소유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소유는 다르다. 예수님은 무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유소유자이셨다. 예수님이 가지신 재산이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가져가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머리에 쓰셨던 가시관이다. 그리고 끝내 그 십자가를 지고 운명하셨다.
우리가 레위기 1장을 연구할 때, 새의 번제를 연구해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망 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제사이다. 아주 흥미롭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개를 숙이시고 요한복음 19장 30절,“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런데 돌아가신 뒤에도 그는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계셨고 여전히 가시관을 쓰고 계셨다. 이 가시관은 우리의 죄의 결과이다. 창세기 3장 19절, 그것을 우리의 죄의 결과를 자기 머리에 쓰셨다. 면류관으로 쓰셨다. 그것을, 우리의 죄의 고통을 당신의 영광으로 쓰셨다.
그리고 끝내 옷까지 다 벗어주시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끝내 이 십자가를 벗지 않으시고 가셨다.
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 하나님께로 부터 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무소유자의 희생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무소유의 개념은 다 주셔서 아무것도 없으신 그 예수님의 죽으심에 개념은 아니다. 다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고난과 우리가 죽어야 될 죽음을 가져가신 유소유자의 죽음이었다.
미국에 한 시인이 예수님의 일생을 보고 쓴 ‘십자가만은 그의 것’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를 쓰고 제목을 그렇게 적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가 처음 누우셨던 침대는 남의 집 말구유를 빌려서 말구유에 누우셨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실 때 그가 타셨던 짐승은 남의 집 마구간에서 빌려온 어린 나귀였다.
그리고 십자가로 가시는 마지막 밤에 남의 집 다락방을 빌려서 마지막 식사를 하셨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주님께서 자기 집이 없으셨던 예수님, 하늘의 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의 마지막 밤은 남의 집 빌린 집이었다. 끝내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 묻히실 수 있는 묘지가 없어서 남의 무덤을 빌려서 누우셨고 주님을 마지막 시신을 쌌던 그 세마포도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변변치 않는 수의 하나 준비하지 못하셨다.
그는 그가 입었던 옷까지 벗어 주시고 남의 세마포로 몸을 두르시고 무덤에 누우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가 쓰신 가시관과 십자가는 오직 그의 것이었다. 그것을 노래로 만든 노래가 있다. ‘십자가만은 그의 것’이라는 노래이다. 내가 그 노래를 좋아한다. 그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우리 주님의 아픈 가슴, 다 주신 사랑의 가슴, 그럼에도 배척받으셨고 멸시받으시고 짓밟히셨던 그 사랑, 그 사랑은 말없이 가신 사랑이었다. 사랑은 말이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다.
을 여기 이 마태복음 3장 16절 17절에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 다시 한 번 마태복음 3장 16절을 본다. “예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여기 첫째, 하나님 성령이다.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임하심을”, “자기위에” 예수님이시다. “임하심을 보시더니” 17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부터 소리가 난다. 말씀하시되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여기 세분의 하나님이 다 모이셨다. 영원한 사랑, 무한한 자기희생의 사랑이 나타났던 것이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3장 16절로 17절
- 레위기 1장 14절
- 요한복음 19장 30절
- 창세기 3장 1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