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두가지 의미
신약에 있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성령을 기록하신 말씀들을 제외하면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는 실제로 성령, 거룩의 영이라고 부른 말씀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요한복음 3장 5절의 말씀에 보면 우리 번역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실제로 헬라어로는 물과 영이다. ‘성’자가 없다.
그것은 성령의 문제를 다룰 때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영이라고 하는 단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령이고 두 번째는, 영 자체는 새로운 본성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에스겔서 36장 26절과 27절에서 봤다.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여러 표상들에 관한 말씀을 신약에 사도 바울이 그 표상들, 모형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을 보면 먼저 홍해 바다를 통과할 때에 성령이 그들 가운데 계셨다고 하는 것을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다.
두 번째로, 고린도전서 10장 3절과 4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 보면 홍해가 아닌 전혀 반대인 반석, 바위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갔는데 이때는 영원한 이미 자유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광야는 한 반석이다. 하나의 한 덩어리 반석이다. 그 반석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석은 분명히 그리스도다. 그런데 이 광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음식이었다. 이것은 만나로 상징된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생수가 나오는데 이 생수는 터진 반석으로부터 마시는 것이다. 터진 반석, 이 반석이 터졌다. 곧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터지면서 생수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반석이신 예수님
이 터진 반석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민수기에 몇 차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보면 모세가 때로는 말씀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지팡이로 그 반석을 명하고 반석을 때렸을 때 갈라지면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성경에 나무는 율법에 대한 중요한 상징이라고 말씀드렸다. 많은 사람들이 반석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분명히 반석이신 것을 이 반석까지는 알지만 반석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는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성경절로 출애굽기 17장 5절 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5절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과거에는 물을 쳤었다. 홍해 바다를 친다. 그런데 이제는 반석을 치는 것이다. 같은 얘기지만 반석도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고 하수도 역시 홍해바다 물도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모형들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 반석 앞에 서 계신다. 반석을 치는 지팡이가 있다. 이 나무는 율법에 대한 상징이 분명하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니” 그냥 저주가 아니다. 율법의 저주이다. 율법의 저주에서 너희를 속량하셨으니 그 다음 13절 끝 부분에 “무릇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선악과나무에 날개와 손발을 잃어버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저주 받은 뱀의 모습이다. 뱀은 날개와 손발을 잃어버리고 몸뚱이만 남아서 있는 대로 나뭇가지에 자기를 기대고 매달렸다가 땅에 떨어져서 기어 다니는 짐승이 되었다. 저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최초의 저주와 나무에 대한 기록이다. 구약에 나타난 나무들은 거듭거듭 율법에 대한 모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홍해를 가를 때도 모세가 지팡이를 홍해 위에 든다. 율법의 저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홍해는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다(고전10:1,2 ; 롬 6:3,4). 율법의 저주 아래서 홍해가 갈라진다. 예수님의 심장이 갈라져 돌아가시는 모습이다. 똑같은 모형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호와 앞에서, 내 앞에서 반석 앞에 서라” 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을 베푸시고 심판을 받아야 될 대상은 반석이다. 율법의 나무로 저주하시는 것이다. 이 똑같은 모형 그대로 주님께서 저주를 받으시고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19장 34절에 드디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쏟아진다. 피는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나타냈고 물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나타낸다. 성령이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는 은혜를 가리키고 있다. 이 똑같은 말씀이 디도서 3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중생의 씻음”은 ‘피로 씻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반석이 터져야만 생수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면 피와 물, 곧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십자가로 가야한다. 생수의 근원이며 성령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하면 그가 먼저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야만,터지셔야만 물, 즉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터지신 피가 먼저다. 그리고 나면 반드시 성령이 오시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죄의 용서 없이 성령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아닌 악령이 온다. 욕심을 만족 시켜주고 이기심과 교만을 만족시켜 주는 악령이 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기심과 교만과 욕심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서 없어져야만 겸손의 영, 자기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의 영, 그 영이 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있고 여전히 영적 교만에 빠져 있으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의 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나쁜 짓, 나쁜 행동은 용서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본성에 들어 있는 교만과 이기심과 욕심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피로 씻으면 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한꺼번에 일어나는 역사다. 손바닥 안과 밖이 동시에 있듯이 그런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의 피는 가르치는데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생수의 은혜는 등한히 한다.
교회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아주 큰 열정으로 교회를 잘 섬겼다. 남의 대학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릴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교회를 지어놓고 보니까 교회가 우상이 된 것이다. 교회가 더 이상 영적으로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돈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백성만을 사랑했던 때가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5절
- 에스겔서 36장 26절로 27절
-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2절
- 고린도전서 10장 3절로 4절
- 고린도전서 10장 4절
- 출애굽기 17장 5절로 6절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2절
- 로마서 6장 3절로 4절
- 요한복음 19장 30절
- 요한복음 19장 34절
- 디도서 3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