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구약의 ‘의롭다’고 하는 말, ‘쟈다크(צךקה)’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된 첫 번째 용례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창세기 38장 26절 말씀 가운데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했던 말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된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이 말씀 가운데서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그가 나보다 옳다”는 말을 했다. ‘쟈다크(צךקה)’는 ‘의롭다’는 히브리말이다. 왜 유다가 이런 말을 했는가?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잠시 설명을 하면, 유다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 큰 아들 엘이 다말이라는 이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엘이 얼마 살다가 못된 짓을 했다. 아주 악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죽는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은 오난인데, 둘째 아들을 그 형수에게 보낸다. 그것이 그 당시의 법이다. 이스라엘은 큰아들이 죽으면 둘째 아들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서 아이를 낳게 해 주어야 한다. 그 둘째 아들이 형수에게 아이를 낳게 해 줄 때 그 아들은 큰 아들 즉, 자기 형님의 유산을 이어받게 된다. 그것이 당시의 법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이 갔는데 이 다말이라는 형수에게 가서 무슨 짓을 했느냐? 법에 의해서 들어가기는 들어갔다. 그 당시의 법이 안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형수와의 그런 관계를 가질 때에 그 형수에게서 태어날 씨가 자기 것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땅에다가 설정을 해버린다. 말씀드리기가 조금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어째든 그냥 남자의 정액을 땅에다 쏟아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씨는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주 너무 악해서 오난도 하나님께서 죽이신다.
그리고 셀라라는 세 번째 아들이 있었다. 당시에 셋째 아들은 나이가 어렸던 것 같다. 장가 갈 나이가 안 되었던 같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너는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이 셋째 아들 셀라가 적어도 남자 구실을 할 만큼 클 때 내가 다시 보내겠다고 말한다. 세월이 지나서 셋째 아들 셀라가 이제 적어도 20세 가까이, 적어도 결혼할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이 아버지가 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큰 아들, 둘째 아들 다 이 큰 며느리한테 갔다가 다 죽었다. 그래서 셋째 아들까지 보내면 또 죽을까봐 아예 안 보낸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자기 아내가 죽었다. 오랫동안 아마 아내가 아팠을지도 모른다. 자기 아내의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여인이 그리워서 지나오는 길에 창녀의 집에 들어가서 창녀와의 관계를 가진다. 그 때 당시 창녀는 부끄럽다고 해서 어떤 여자인지 모르게 면박을 해서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 요즘은 얼굴을 내 놓고 그런 성매매를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그런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들어가서 관계를 가지는데 그 창녀가 말하기를 돈을 달라, 몸값을 달라고 하니까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면 당신이 나중에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나한테 주라, 그리고 나중에 보낼 때는 내가 당신 지팡이하고 도장을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 여자에게 들어간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며느리 다말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 다말은 지혜로운 여자이다. 어차피 시아버지가 자기 시동생을 자기에게 보내서 아이를 낳게 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 며느리 된 다말은 그 유다 집에 들어가서 유다의 씨를 남겨주는 것이 자기 의무이다. 그것이 지켜야 될 법이다. 그런데 그 조건을 이루어주지 않자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오는 도중에 길가에 앉아서 창녀처럼 얼굴을 가리고 그 시아버지를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 때에 임신이 되어서 쌍둥이를 가지게 된다. 몇 달 안 되어서 배가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동네에서 소문이 난 것이다. 유다보고 하는 말이 “당신 며느리가 간음을 해서 못된 짓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 된다. 저를 죽여야 된다. 저런 더러운 짓을 한 여자를 가만 두면 되지 않는다.” 그 당시 법에 간음한 여자는 데려다가 돌로 치던지 불에 불살라 죽인다.
끌고 나오는데 다말이 지팡이하고 도장을 들고 내가 이 지팡이와 도장 주인으로 임신을 했다. 유다가 보니까 자기의 것이었다. 그래서 유다가 한 말이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의롭도다. 왜 그런가? 이 며느리 다말은 자기가 여자로서, 한 집안의 며느리로써 자기가 해야 될 의무를 하기 위해서 법을 지킨 것이다. 며느리 법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시아버지 된 유다는 법을 지키지 않았다. 반드시 법대로 자기 셋째 아들이 다 커서 결혼할 만한 나이가 됐는데도 형수에게 보내지 않은 것이다. 법을 어겼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회법, 관례법으로 보면 시아버지 유다는 법을 안 지켰고, 며느리 다말은 어찌됐든 유다가 되었든, 그 아들들이 되었든 그 유다 집안에 씨를 남겨준 것이다. 그래서 ‘의롭다’ 즉, ‘쟈다크(צךק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라는 말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법을 지킨 것을 ‘의’라고 말하고 있다. 명사는 ‘재대크’라는 단어인데, 의를 만든 것은 며느리 다말이었지, 유다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유다는 불의한 사람이 된 것이다. 유다는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었고, 다말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왜 기록했느냐? 그 부도덕한,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하고 관계를 가져서 애를 낳느냐? 그렇지만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는 그것이 정당한 것이다. 어쨌든, 아들이든 시아버지든 관계없이 그 집안에 들어가서 며느리로써 자손을 남겨줘야 되는 그 법을 지킨 것이다. 우리가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 당시 사회법으로는 그가 법을 지킨 것이다. 그래서 이 옳다는, 의롭다는 말이 나온다.
'의'의 본
이제 우리가 조금 더 이 말씀을 비추어서 언약 관계 속에 나타난 ‘의’를 살펴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자기의 유전자를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우리는 본래 창조될 때, 거짓말이 안 되고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그런 종자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손상되지 않은 사랑의 법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언제든지 자유로 본인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로마서 2장 15절, 율법 없는 이방인도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양심이라고 바울은 말했고 본성이라고 말했다. 그 법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되고 아들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부자간의 언약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을 사람이 깨트린다. 출애굽기 34장 28절에 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이다. 열 가지 말씀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유전자 속에, 하나님께 유전자가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표현한다. 하나님 마음속에는 있는 법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전되었다.
그 법을 어겼을 때 그 언약이 깨졌고 그것을 ‘불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불의한 자고, 다말은 법을 지켜서 의로운 자라는 말을 들었다.
성경구절
- 창세기 38장 26절
- 창세기 1장 26절
- 로마서 2장 15절
- 출애굽기 34장 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