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모든것을 믿고 맡긴 백부장의 믿음
흔히 마태복음을 믿음의 책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에 특별히 믿음에 관한 주님의 말씀들이 꽤 많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8장 23절로 27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주님께서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너무 피곤하셔서 배 안에서 잠이 드셨다. 아마도 예수님의 그 육체적 형편은 한참 젊으실 때이고 또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셨고 일을 많이 하셔서 건강하셨을 것이다. 근육질의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친 봉사, 하나님께 받아서 전달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밤이면 기도로 거의 밤을 새울 때가 많았다.
날마다 그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고쳐야 되기 때문에 받는 시간, 충전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밤에도 새벽에도 계속 나아가서 하나님께 받으시는 기도의 삶을 사셨다. 그래서 아마도 꽤 많이 피곤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갈릴리 바다 위에서 갑자기 태풍이 불어도 깨어나실 줄을 모를 정도로 심히 고단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마태복음 8장 24절에 보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치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어부였다. 실제로 그 갈릴리 호수에서, 성경에는 물이 많은 곳은 그냥 바다라고 부른다. 구약은 특별히 더 그렇다. 그래서 호수든 실제로 바다든 상관없이 바다라고 번역한다. 갈릴리도 사실은 호수이지 바다는 아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당시의 그렇게 표현하는 습관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쨌든 이 바다, 갈릴리 바다에서 피곤해서 주무시던 예수님, 태풍이 불어도 모르시던 예수님, 그 때 제자들이 어떤 일을 했을까 한 번 상상해 보라. 제자들은 말씀드린 대로 어부들이었다. 비바람이 치고 배가 뒤집어지려고 할 때, 물이 배에 꽤 많이 고였을 것이다. 파도가 치면서 물이 이리 들어오고 저리 들어오고 비는 계속 오고 거의 침몰 직전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의심과 믿음에 대해 얘기한 것처럼 보인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말이 반대말처럼 보인다. 실제로 여기서 일어난 현상을 머릿속에서 상상해 보라, 이 사람들이 그냥 물이 차도록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지런히 물을 퍼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파선이 될 만큼 힘들어 졌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깨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왜 의심하였느냐’ 그 다음 말씀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다.
믿음과 행함의 일치
그들이 예수님이 계시니까 틀림없이 파도에 휩쓸려 파산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물을 퍼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로 믿었다면 배에 물이 들어와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계시니까, 설마 예수님이 계신데 배가 가라앉으랴! 아니다, 내 생각은 이 분들이 물을 퍼냈다. 그리고 있는 대로 노를 젓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흔히 어떤 분들이 머리로 믿는 확신이 어떤 일을 벌일 것이다 고 얘기 하는 분들이 계신다. 소위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할까 정신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맞는 소리이지만 한편으로는 맞지 않는 소리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하는 주제이다.
이 내용이 무엇인가? 그들이 마음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 깨우지 않고 내버려 뒀다면 예수님이 주무실지라도 예수님은 절대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파선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놀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확실히 나를 의롭게 해 주실 수 있다 하고 머리로 믿고 여전히 죄를 짓는 분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에 가진 확신은 중요하다. 하지만 삶에 나타난 열매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하고 생각한다. 여러분,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것을 참람이라고 말한다, 참람이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을 성전 높은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한다. 이때 마귀가 쓴 성경 절이 시편 91편 11절 12절이다.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의인의 길에서 지키시겠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해 주겠다. 천사를 보내서 지켜 주겠다. 그런데 11절 맨 밑에 보면 끝부분에 분명히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에서 ‘네 모든 길에’라는 말을 사단이 빼 버렸다.
이 말씀에서 사단이 짜집기 한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이 뛰어 내려야 한다. 그러면 천사들이 와서 돌에 부딪치지 않게 받쳐 줄 것이다. 안 뛰어 내리면 무엇인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왜 못 뛰어 내리느냐? 넌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4장 6절에 인용한 사단의 이야기,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완전히 짜집기한 말씀이다.
내가 실제로 교회에서 이 마태복음 4장 6절과 시편 91편 11절과 12절 양쪽에 앉은 분들에게 읽고 찾아내라고 하면 찾아내는 분들이 많지 않다. 다 똑같네요, 비슷하네요! 아니다, 분명히 여기 ‘네 모든 길에’라는 이 구절을 없애버린 것이다. 여기 ‘네’가 누구인가? 의인이다. ‘의인의 모든 길에서’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자신을 맡겨라
예수님의 대답이 분명하다. “기록되었으되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무슨 길인가? 의인의 길인가? 아니다, 악인의 길이다. 제초제 한 병을 갖다 놓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능력이 있으시죠? 독약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고 했으니 지금부터 이 제초제를 한 병 마시겠으니 저를 지켜 주십시오. 이것은 의인의 길인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인의 길인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실은 이것이다. 이 제자들이 믿었던 믿음은, 본인들이 열심히 물을 퍼내고 노력해도 죽게 되니까 예수님을 찾았던 연약한 믿음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신해야 될 사실은 마음으로 믿는 확신,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의 부족함은 바로 마음의 확신도 부족했지만, 물론 이것은 당연히 부족했고 동시에 하나님께 맡기는 실제적인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삼성병원의 어느 유명한 박사님이 무슨 암을 잘 고친다고 하여 이것을 마음에 확신하면 자신을 갖다 맡긴다. 이 두 개중에 한 쪽만, 즉 마음의 확신만이 믿음이다 혹은 아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만이 믿음이다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같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 박사님에게 온 몸을 다 맡기게 된다. 틀림없이 이 박사님께 가면 낫는다. 예수님께 가면 낫는다는 마음의 지적인 확신이 있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기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믿고 몸으로는 딴 짓을 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예수님은 결국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내 마음으로 그렇게 확신하고 믿으니까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람이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8장 23-27절
- 시편 91장 11,12절
- 마태복음 4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