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근원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병으로부터 구원 얻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맡긴 믿음과 자기 죄와 존재 자체를 맡겨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믿음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믿음의 본질적인 성격이 무엇인지를 공부했기 때문에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믿음이 만들어지는 근원을 좀 생각해 보자.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믿음에 대한 말씀을 사도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두 단어 ‘사랑’과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하는’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에네르게오”라는 단어이다. ‘힘을 만든다’는 동사이다. 헬라어의 ‘에네르기아’라는 단어가 있다. ‘에네르기아(energia)’ 라는 명사에서 영어의 ‘에너지(energy)’라는 말이 나왔다. ‘에너지(energy)’는 헬라어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특별히 ‘오’라고 하는 동사에 붙는 접미어가 있는데 이것은 ‘만든다’는 뜻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에너지를 만든다’라고 직역을 해도 틀리지 않는다. 에너지를 ‘만든다’. ‘에네르기아’를 만든다.
갈라디아서 속의 사도바울의 신앙간증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믿음과 사랑이라는 같은 말씀을 또 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정말 유명한 사도바울의 자기 신앙 간증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했다. 이 말씀의 근거는 갈라디아서 2장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다시 말하면, 율법이 너는 죄인이다! 하고 지적을 한다. 그래서 너는 죽어야 된다! 그래서 죽으라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죽음을 죽었다. 이미 죽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내 대신 대속하신, 이미 내 죄로 돌아가신 예수님 속에서 죽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2천 년 전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 죽음의 사건 속에서 나는 이미 죽었다.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내 죄를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다시 반복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산 것이 아니요’ 할 때 ‘나’는 ‘죄의 본성’ 즉, ‘죄’를 가리킨다.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죄는 죽었고 새로 다시 태어난, 부활한, 거듭난 내가 하나 더 나온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할 때 ’나’는 ‘거듭난 사람’ ‘거듭난 본성’이다. ‘나를 사랑하사’에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동사이긴 하지만, 헬라어는 ‘아가파오(αγαπαω)’라고 되어 있다. 아가파오(αγαπαω)라는 동사의 의미는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듯이 자동적으로 다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사랑을 말한다. 명사가 되면 ‘아가페(αγαπη)’가 된다. 다 일방적으로 갖다 붓기만 하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씀한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앞에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아들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사랑이 만들어낸 열매
항상 사용하는 예화이지만 사랑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사랑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주 절대적이고 자동적인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이 본능적인 사랑에 의해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남자가 여자에게, 물론 여자도 사랑할 수 있지만, 성경에는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사모한다고 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남자의 사랑을 받아서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아서 사모하는 사람이다. 종류가 좀 다른 것이다.
여자가 열등해서, 낮아서가 아니고,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다. 그리고 하와가 나중에 창조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와도 동일하게 사랑하시지만, 남편이 먼저 받은 사랑으로 뒤에 창조된 하와를 그렇게 사랑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남자가 여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여자가 남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은 창세기 2장에 없다. 창세기 2장 23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다.
분명한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이 신부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온갖 애정을 다 쏟아 부으면 그 아내가 남편의 어깨에 자기의 머리를 갖다 댄다. 나는 내 인생을 당신의 사랑에 맡기겠습니다! 하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믿음이란 사랑이 만들어낸 열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은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버리신, 자기 몸까지,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분에게 모든 것을 그분을 믿게 만든, 곧 맡기게 만든 믿음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정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공식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왜 저분은 믿음이 없냐?”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잘못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믿음이 없는 것은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은 만큼 맡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주님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다 버리시면서 생명을 바쳐 사랑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도 자기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생명까지 맡기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만드는 열매요 선물이다. 그래서 믿음을 만들려고 하면, 내가 주님을 정말로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으려고 하면, 먼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시간 싸움이다. 예수님의 사랑,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느냐, 그 사랑을 받기위해서 내가 얼마나 마음을 열어 놓았느냐, 그 열어놓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그 사랑에 반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다 맡기는 믿음이다. 복음성가 같은 유행가 노래 가운데 그런 노래가 있다. “Only love can make a memory.” 오직 사랑만이 추억을 만든다. “Only love can make a love.”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만든다.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를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아니다. 사랑을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내 사랑을 받은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조건적 사랑이 아니다. 무조건 퍼부어 주는 일방적으로 다 주어야만 행복한 내 마음, 내 목숨까지 주어야 행복한 내 마음, 너의 행복만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주어야만 행복한 내 사랑을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주시는 선물이다.
성경구절
- 갈라디아서 5장 6절
- 갈라디아서 2장 19,20절
- 창세기 2장
- 창세기 2장 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