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다시 낳으시기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3절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이 거듭남의 주인은 낳아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성경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어머니와 같은 모양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십자가로 가시기 바로 전에 하셨던 말씀, 요한복음 16장 21절 말씀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낳으시기 위하여 당하시는 그 고난을 볼 수 있다.
물론 제자들도 함께 근심하고 걱정했지만 예수님의 근심과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정말 너무 힘드셔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옮겨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던 주님의 그 고난은 결국 우리를 다시 낳아주시는 어머니의 고난이었다.
창세기 3장 16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과 더불어 창세기의 복음이라고 나는 늘 말한다. 창세기 3장 16절에 먼저 유혹에 넘어갔던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해산의 고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낳으시는 고통을 경험하게 해 주시는 은혜였다. 만약에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더라면 해산의 고통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낳을 때는 웃으면서 아이를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해산의 고통이 더해졌을 때에 아이를 낳는 고통과 더불어서 엄마가 태와 함께 피와 물을 쏟아낸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아이가 나오면서 엄마는 피와 물을 쏟는다. 이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우리를 다시 낳아주실 때에 그분이 당하신 고통을 미리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분의 심장이 갈라지신다. 우리의 죄로 그가 죽임을 당하시는데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로마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다고 말하고 있다.
피와 물이 쏟아진 것은 하나의 중요한 모형이었다. 곧 엄마가 아기를 낳은 다음에 쏟는 피와 물은 아이를 낳았다는 증거물이다. 해산을 끝냈다는 증거물이다. 그래서 태와 함께 피와 물을 쏟아내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내출혈, 속에서 피가 터졌던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피가 속에서 고여 피 떡과 혈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것이 옆구리가 갈라지면서 예수님의 옆구리와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망 원인은 내출혈이다.
속에서 피가 터진 것이다. 물론 채찍에 맞아서 많은 출혈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사망의 원인은 내출혈이다. 이 이야기는 스가랴 13장 6절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기록을 보면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여기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 상처가 ‘두 팔 사이의 상처’라고 되어있다. 본래 히브리말은 ‘두 손 사이의 상처’이다. 팔이나 손이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손 혹은 두 팔 사이의 상처는 열왕기하 9장 24절에 옛날 이스라엘의 왕 예후가 타락한 왕 요람의 두 팔 사이를 활로 쏘는 장면이 나온다. 열왕기하 9장 24절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앞의 스가랴 13장 6절에서 말한 두 손 사이 혹은 두 팔 사이, 이 두 성경 절은 분명히 두 손 혹은 두 팔 사이의 상처가 심장 파열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사망원인은 우리의 죄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의 결과로 심장이 파열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슴에 묻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 없는 유전자로, 죄 없는 새 마음과 새 영으로 다시 거듭 낳으셨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산부인과 침대이다. 애를 잘 낳으라고 양 손 양 발에다 못 박히시고 우리 죄를 없애시고 새 생명으로 죄 없는 유전자로 다시 낳으시기 위하여 그분이 당하신 산고의 고통이었다.
아들과 함께 고난 당하신 하나님
한 가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아이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절대 어머니가 혼자 애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 노릇을 한 것이 누구인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고난을 당하셨다. 어머니 노릇을 하신 예수님, 이것은 물론 하나의 비유적 해석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2절에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나려고 할 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혼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혼자 우리의 죄 짐을 지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 자신의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안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영광, 그 피투성이 되신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생명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는 이 ‘안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말로 ‘야다’라고 부른다. 헬라어는 ‘기노스코’이다. 이것은 ‘동침한다’는 뜻이다(눅 1:34). 마치 부부가 동침하여 아이를 낳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우리의 죄를 끌어안고 자식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낳으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헤브’라는 동사이다. 그것은 ‘헌신한다’, ‘바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면 반드시 그 뒤에 자기를 주셨으니 그렇게 말이 나와야 맞다. 그게 본래 히브리말 어법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드린다, 바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남편이 아내를 이처럼 사랑해서 자기를 주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가 아니고 자기를 주셨으니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이유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4장 10절에도 말씀하시기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분이 자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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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3절
- 요한복음 16장 21절
- 창세기 3장 16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요한복음 19장 30절
- 요한복음 19장 34절
- 스가랴 13장 6절
- 요한복음 16장 32절
- 고린도전서 4장 6절
- 누가복음 1장 34절
- 요한복음 10장 30절
- 요한복음 14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