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40일 기도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펴시고 기도하시고 명상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40일 기도에 가장 근본적으로 준비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 금식이다.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다. 왜, 금식을 하셨는가? 꼭 금식을 해야 되는가? 사람들이 묻는다.
예수님의 40일 기도- 금식
왜 그렇게 주님께서 금식하셨을까? 꼭 그렇게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되는가?
금식은 절대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밥이 먹히지 않아서 금식하는 것이다. 이 금식기도에 관한 가장 좋은 이야기는 이사야 58장에 있다. 여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58장6~7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금식의 내용이 분명하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한 금식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고통당하는 죄인들을 위한 금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같은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식하지 않는가? 어려운 일 생기면 밥 먹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위한 것인데 주님은 절대 아니다. 좀 다른 말로 얘기하면 자기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다.
여기 주님께서 하신 금식은 바로 그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7절에 가면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 하신다. 그러니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필요한 자들에게 자기 모든 것을 주는 금식이다.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 때문에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넘겨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른 사람이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고통 할 때 그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그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금식이다.
어차피 맡긴 인생이니까 맡기고 자기 혼자 살아가면 되고 혼자서 잘 살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고민하시고 고통하시고 괴로워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여기 7절에는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형제들, 혈육들, 가족들 주변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 피한다. 심지어 예수 믿는 우리도 그렇게 한다. 특별히 형제들은 아주 내 돈이 자기 돈처럼 내 놓으라는 형제들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 싫어한다. 그런 얘기 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금식이 뭔지? 기억하시기 바란다.
예수님의 40일 기도- 침묵
두 번째 말의 금식 곧 사람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광야로 간 이유가 사람하고 말하지 않으려고 가셨다. 왜 광야로 갔는가? 하나님과만 말씀하시기 위해서 가셨다. 여러분 정말로 놀라운 일은, 이 영성훈련은 어느 종교나 다 이 침묵이 기본이다. 불교든 유교든 천주교회든 기독교든 어느 종교든지 이게 기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섬기는 신과 오직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부부간에도 둘이만 있고 싶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대표적인 것이 신혼여행이다. 그때는 절대로 엄마가 따라가지 않는데 왜 그런가? 둘만의 시간을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침묵은 무엇인가? 예수님과의 신혼이다. 가장 깊은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엄청난 은혜요. 특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한 허니문, 하나님과 우리와의 허니문, 이 시간에 대해 너무나 경험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명하신다. 여기에서만 참된 쉼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효과적인 준비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중과 인생의 격렬한 활동으로 인한 긴장 속에서 이와 같이 소생함을 받은 영혼은 빛과 화평의 분위기로 둘리울 것이다. 그 생애는 향기를 내뿜을 것이며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킬 하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부르짖음은 무한하신 긍휼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 상달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신성과 인성을 연결시킬 하늘의 전류로 충전되기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탄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는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이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암이 걸렸든지, 사업이 망해서 재산을 다 탕진했든지 등 청천벽력 같은 어떤 환란이나 시련들을 만나서. 모든 것이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몸 하나 남을 때가 있다. 목숨하나 붙었고 그저 죽지 않으면 다행인 환란을 당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섭리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섭리를 허락하시냐 하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러신다. 첫째는 우리 본 모습이다. 싹 벗기시고 나면 알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다 벗기시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보인다. 두 가지가 보인다. 다 없어지면 나의 모습과 예수님 모습 밖에는 남는 게 없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 방법 외에는 무엇이 앞을 많이 가려서 안 보인다. 자기도 못보고 예수님도 못 본다. 누가복음 9:36에 “예수만 보이시더라” 그랬는데 그 ‘예수만 보이는 것’은 다 없어졌을 때 보인다.
그래서 이사야 29장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아놓은 것은 ‘죄’라고 그랬다.
성경구절
- 이사야 58장 6-7절
- 시편 46편 10절
- 누가복음 9장 36절
- 이사야 29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