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거듭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과연 거듭난 사람의 상태가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거듭난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거듭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의 모세라는 사람이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사십일 동안 시내산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십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이 보이는 바로 시내산 그 밑에서, 모세가 사라지자 드디어 죄악적인 본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아론을 자극하여 애굽에서 우상숭배 하던 습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광란의 몸짓을 한다.
당신이 앞에 나타나서 얼마 전에 산을 흔들고 천둥 벼락과 함께 말씀하시고 우레 가운데서 빛을 보이시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기들의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는데서 그들은 그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전에서 의자를 다 뒤로 치우고 여기서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일어나서 술을 먹고 광란의 춤을 추고 아무나 붙잡고 그런 음란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혹시 유흥업소 가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빤히 보이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회개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을 쓸어버릴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하는 말이 나온다.
출애굽기 32장 32절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가 하는 기도를 들어보라, 놀라운 기도이다. 한글 성경에는 그냥 “여호와여 합의하시오면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히브리어로 ‘나사’이다. ‘나사’라는 말은 짊어지고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기도이다. “저들의 죄를 짊어지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감히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저들의 죄를 짊어지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모세는 분명히 거듭난 사람이다. 그 증거가 분명하다. 모세가 드린 기도는 베드로전서 1장 10, 11절에 말씀 하신대로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기도는 모세가 한 것이 아니다. 모세 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하신 기도이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자신이 얻은 구원, 영원한 생명을 그들의 죄와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예수님의 기도이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우리들의 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미친 우리들의 죄와 바꾸셨다. 그것은 바로 모세 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하신 기도이다. 그렇다, 분명히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자로, 유전자로 거듭난 사람이다.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의 영이 그 속에 계시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아니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기를 영원히 희생시키신 사랑, 그 사랑의 영이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자식들을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기도하셨던 그 예수님의 영, 예수님의 본성, 예수님의 유전자가 모세 안에도 생겨났다는 사실을 증거 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자개량이 거듭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종자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옛 사람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자로, 유전자로 재창조 되는 것이다. 거듭,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구약이나 신약에 ‘새것’ 이라는 단어는 다 ‘창조’ 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종자,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의 종자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이웃만을 사랑하여 자기를 영원히 희생하신 그 사랑의 종자가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 형상을 받은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구약의 또 한 사람의 거듭난 사람의 표본, 특별히 드러난 사람 다니엘이다.
다니엘이 그의 인생의 거의 말년에 어쩌면 은퇴하고 쉬어야할 나이에도 그는 국가의 일을 보고, 하나님의 사업에 모든 것을 다해 기도하는 종이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70년이 끝나가는 그 즈음에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했다.
예레미야 25장 15절에 바벨론에 포로로 간 사람들이 70년 동안, 예루살렘이 황폐한 동안에 거기 있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 시간이 차는 동안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눈물로 기도와 소원을 아뢴다.
다니엘 9장 3절에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여기 세 단어가 나오는데 첫 번째 금식이다. 다니엘은 자기가 마땅히 죽어야 될 죄인이라서 금식한다.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일이 없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는 금식하고 죽은 사람이 입는 옷, 베옷을 입는다.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서, 시체가 입는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썼다. 자기는 불에 타서 영원히 없어져야 될 죄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시작한다. 다니엘 9장 5절 이후에 보면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여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절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
다니엘 9장 20절에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라고 기록되었는데, 우리가 아는 대로 다니엘은 우상을 숭배한 일이 없다. 하나님을 반역한 일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사실은 다니엘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이다. 다니엘이 저들이 범죄 하였나이다 라고하지 않는다. 우리가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다. 거듭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아무개 집사님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다.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내 집 앞 눈만 쓰는 게 아니다. 동네 모든 집 앞의 눈을 다 쓸어준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과 고통과 눈물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웃는 자들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천주교 미사 때 천주교 신자들이 가슴을 두드리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교회가 잘못된 것, 사회가 잘못된 것, 국가가 잘못된 것, 내 가족이 잘못된 것은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그는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거듭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신약의 스데반이 그랬다.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가슴속에 있었던 사랑이다. 그 정신이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는 이렇게 죽어도 좋으니, 내가 저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겠사오니 나를 죽이는 자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죄의 이기심에 미쳐버린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시던 예수님! 바로 다니엘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 그리스도의 영이 다니엘 속에도 계셨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자기가 한 기도가 아닌 것이다. 주님께서 다니엘 속에서 기도하셨다.
바울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또 한 사람의 거듭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예수님과 같은 정신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빌립보 3장 6절에서 예수님 만나기 전에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증언한다.
그 율법으로 흠이 없어지도록 살아온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였다. 자기가 의인중의 의인이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사람 앞에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문자적 율법을 지킨 이유조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에 의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다음에 로마서 7장 15절로 18절에 마지막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문자적 율법, 유대인들이 만든 613개의 법을 다 지켜서 그는 율법으로 흠이 없었던 사람이지만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동기와 정신이 자기를 사랑하는 죄에 뿌리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울 속에 예수님이 계셨다. 십자가가 보였고 채찍이 보였고 대못이 보였다면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보인 것은 우리밖에 보인 것이 없었다. 영원한 죽음 속에, 영원한 죄 속에 죽어가는 우리들 밖에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바로 그 정신, 그 유전자를 바울 속에 예수님이 넣어 주셨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간다. 그에게는 예수님처럼 죽어가는 영혼들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훗날 기록하기를 로마서 9장 1절로 3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다.
여기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치지 않는 고통은 저주받아, 심판받아 마땅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정말로 철면피 같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을, 자기 동족, 친척을 구원하는 일에 그는 그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누구 정신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가슴에 있는 정신이다.
그가 분명히 3절에 말씀한 것처럼 “내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질 지라도” 나는 죽을지라도 그들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은 막을 수 없고 말릴 수 없다. 죽음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만을 바라보시고 오셨던 그 사랑은 무덤을 터널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무덤이 열린 것이다. 그 사랑은 이겼다! 죽음을 이긴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38, 39절이 말씀하기 전, 앞에서 했던 말 그대로 그는 자기정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기 동족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사랑이 이겼다. 이 정신, 이 종자, 이 유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전자이다. 우리가 이 유전자를 받지 않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절대로 이렇게 살 수 없다. 이것은 자동이다. 이렇게 안하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본능적 사랑인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분명히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가슴속에 묻히고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이웃만을 사랑하는 유전자로, 그 종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갈라놓은, 주님을 죽인 죄는 바로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위해서 사는 내 구원과, 내 행복과, 내 축복만을 위해서 사는 그리고 그렇게 신앙하는 우리들의 그 종자가, 이기심의 종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갈라서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심과 자기사랑에 미친 우리를 주님은 가슴에 묻고 용서하고 가셨다. 말없이 용서하고 묻고 가셨다.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 올 때에, 그 말없는 사랑이 우리 이기심과 자기사랑을 녹여버릴 때에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자로 다시 거듭날 수 있다. 죽지 않으면 절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위대한 모세나 바울 같은 하나님의 종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악함과 죄(자기사랑의 죄)를 깨닫고 한없이 통곡하고 회개하고 그 용서의 사랑에 자신을 맡겼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승리하신 것이다. 죄를 이기신 것이다.
오늘 우리 가슴속에서도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죄(자기사랑, 이기심, 욕심 등)를 넉넉히 녹여버리고 자신을 영원히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재창조 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성경구절
- 출애굽기 32장 32절
- 베드로전서 1장 10,11절
- 누가복음 23장 34절
- 고린도후서 5장 17절
- 예레미야 25장 15절
- 다니엘 9장 3절
- 다니엘 9장 5절
- 다니엘 9장 20절
- 누가복음 24잘 34절
- 빌립보 3장 6절
- 로마서 7장 15절로 18절
- 로마서 9장 1절로 3절
- 로마서 8장 38~3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