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체적인 공식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 1번순서-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2번순서-그 은혜, 그 사랑에 반응할 때 믿음이 창조되고, 그 믿음으로 죄를 맡기게 됨으로 구원을 얻음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3번순서-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됐고 은혜로 종결되기 때문에 결과는 하나님의 선물임 |
전체적인 공식과 실행의 조화
에베소서 2:8(공식) | 요한복음 3:16(실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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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주신 것은 죄인의 요구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임)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하나님은 조건없이 용서하시고 그 용서를 주셨지만 받는 죄인은 자기의 죄를 맡길 때(믿음), 맡기는 자마다 구원을 얻음)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로부터 구원과 그 결과인 영생은 죄인 스스로는 불가능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선물 임) |
2. 단계별 공식 1단계-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품으로 데리고 돌아가신다.
에스겔 36:24“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고 동정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그리고 그 집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신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종들에게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의 어떤 집에 가서 나의 양 한 마리를 찾으라고 명하셨다.
한 영혼 한 영혼은 마치 구주께서 그 사람만을 위해 돌아가신 것처럼, 예수께 완전히 알려져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은 예수의 마음을 움직인다. 도움을 구하는 외침은 예수의 귀에 도달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기 위해 오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신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들이 당신께 오도록 끌어당기신다. 많은 사람은 이끌리는 것을 거절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당신을 부르는 소리를 기쁨으로 듣고 목자이신 당신의 돌봄에 몸을 맡기려 하는 자도 아신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요 10:27)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그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신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른다.”(요 10:3,4)동방의 목자는 양을 다그치지 않는다. 그는 폭력이나 공포심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이 앞에 가며 양들을 부른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으므로, 그 부르는 소리에 따른다.
구주이신 목자 예수도 이와 같이 당신의 양을 돌보신다. 성경은 말한다. “주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주의 백성을 양떼처럼 인도하셨다.”(시 77:20/현인) 예언자를 통해 예수께서는 선언하신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내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풀었다.”(렘 31:3)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아무에게도 강요하시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호 11:4)
제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 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원한 보응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갈바리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여정을 통해 나타난 구주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보았다. 구주의 그 모습이 그들을 끌어당기고 영혼을 부드럽게 하여 정복한 것이다. 예수를 우러러보는 자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눈을 뜬다. 그들은 예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른다.
목자가 양들 앞서 가서 자신이 먼저 길의 위험을 만나듯이, 예수 또한 당신의 백성에게 그렇게 하신다. “목자가 자기 양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낸 후, 양들 앞에서 걸어”간다.(요 10:4) 하늘로 가는 길은 구주의 발자국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길은 험하고 바위투성이일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의 발은 끔찍한 가시를 내리밟아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가기 쉽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도록 요구 받은 어떠한 짐도 친히 지셨다.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 자상한 성품은 조금도 잃지 않으셨다. 오늘날에도 똑같이 따뜻한 동정으로 가득 찬 예수의 마음은 인류의 모든 고뇌에 열려 있다. 찔린 손은 세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고자 오늘도 내밀어져 있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요 10:28) 그리스도께 헌신한 영혼은 그리스도의 눈에 온 세상보다도 소중하다. 구주께서는 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갈바리의 고통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시련의 때도 결코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으신 도움의 주께서 계신다. 주께서는 우리가 홀로 유혹에 저항하고 악과 싸우다가 마침내 무거운 짐과 슬픔에 압도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지금은 예수께서 인간의 눈에 숨겨져 있지만, 믿음의 귀는 예수의 음성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나는 살아 있는 자이다. 내가 전에 죽었으나, 이제는 영원히 살아 있…다.”(사 41:10/한킹; 계 1:18) “나는 그대의 슬픔을 견뎠고 그대의 고투를 경험했으며 그대의 유혹을 만났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울었다.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려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고독하게 버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대의 고통을 심금(心琴)으로 느껴 주는 사람이 이 땅에 없을지라도,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살아라.”“산들이 사라지고 언덕들이 옮겨진다 하더라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내 평화의 약속은 없어지지 않는다.’ 너에게 자비를 베푸는 여호와의 말씀이다.”(사 54:10)
목자가 자신의 양을 아무리 사랑할지라도, 역시 자신의 아들딸들을 더욱 사랑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목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요 10:14, 15)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하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 하나님께서 “내 친구인 사람”이라고 선언하신 분, 그분과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스도와 지상의 자녀들과의 교제로 묘사하시다니!(슥 13:7)
우리가 그분의 아버지의 선물이며 예수께서 하신 일의 보상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께서는 거짓 목자에게 잘못 인도 받은 세계 도처에 있는 영혼에게 마음을 기울이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목장의 양으로 모으려 열망하신 사람들이 늑대 사이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요 10:16)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7)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아버지께서 그대를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대를 구속하려고 생명을 바친 나를 더욱 사랑해주신다. 나의 생명을 바쳐 그대의 부채와 그대의 죄과를 가져가 그대의 대리인과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사랑받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요 10:17, 18) 예수께서는 인류 가족의 일원으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샘이셨다. 예수께서는 죽음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그 주권하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생명을 가져오고 영원한 생명에 불을 지피려고 자원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예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세상의 죄를 지고 죄의 저주를 견디며 당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다.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다.”(사 53:4∼6)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자식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다. 이 ‘아버지’ 라는 말씀 때문에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사랑의 편지’ 라고 말씀 드리면 맞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우리가 범죄 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 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확인하고자 한다.
사44:22 말씀을 보면,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을 좀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죄를 도말하셨다’는 이 말의 뜻은 ‘죄를 완전히 없앴다’ 죄를 완전히 없앴기 때문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이 ‘돌아오라’는 말씀은 흔히 ‘회개한다’는 말로 쓰였다. 이 회개에 대해서는 5장(성경이 말하는 회개)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서 그 다음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돌아가기 전에 이미 다 해 놓으신 것,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용서’ 라고 한다.
‘은혜’라는 단어는 범죄 후에 생긴 단어이다. 이 은혜라는 말을 범죄 한 죄인에게 사용한 말씀인데 이 말씀이 딤후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이미 주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영어번역은 ‘시간이 시작하기 전’(NKJV) 이라고 번역을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졌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은혜라는 단어는 분명히 범죄 한 죄인에게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용서는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용서가 1번이고, 2번째가 창조이고, 3번째가 타락, 4번째가 회개 그리고 5번째가 이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사야 44:22 말씀을 보면,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하셨다. 그런데 이사야 55:7에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말씀하고 계신다. 같은 성경에 한쪽은 ‘용서’하셨고 ‘도말’하셨다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셨는데 또 다른 쪽에는 ‘용서하시리라’고 왜 미래형으로 사용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과 죄인의 입장의 차이이다. 이사야 44:22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이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셨으되 조건 없이 하셨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 후서 1:9말씀대로 영원 전부터 미래를 아시고 미리 용서의 은혜를 주셨다. 조건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의 품성이다.
그러나 죄인의 입장은 다르다. 죄인은 이사야 55:7말씀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죄를 버리라’, 즉 ‘죄를 하나님께 맡기라’이다. 그러면 ‘용서하시리라’고 미래형으로 그리고 조건부로 말씀하신다.
모든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고 알려진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인을 의롭게 여기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도 알고 있는 죄를 그대로 행하거나 알고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칭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완전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죄를 버리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성과 연합으로 죄의 유혹과 충동이 올 때마다 예수님께 죄를 맡길 수 있다. 죄를 맡기는 일은 9장(승리의 공식)에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죄인은 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보다 죄가 더 좋기 때문에 죄를 버리거나 맡길 생각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데 이기적인 죄인이라 할지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면 놓는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을 통하여 더 좋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하면 죄를 하나님께 버리고 맡기게 된다. 이것이 “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롬 2:4)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미 주신 용서는 죄인이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빈손으로 용서를 받아들일 때 본인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회개도 안했는데 용서를 하나님이 해 주셨느냐? 고 반문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디모데후서 1:9에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한마디도 한 구절도 단어 하나도 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어떤 분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천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도바울 자신도 그 얘기를 하셨는데 자기도 하나님께서 전달하라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지 자기에게도 절대로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갈라디아서 1:8절에 말씀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도 우편배달부일 뿐이지 그 사람이 편지를 쓴 분이 아니다. 편지를 전달하는 우편배달부가 자기가 가지고 간 편지를 자기 마음대로 고쳐가지고 준다면 그것은 정말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주셨다. 회개해야 용서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문제는 주신 용서를 죄인이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빈손으로 받느냐 아니면 끝까지 자기 죄를 움켜쥐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를 거절하느냐, 소홀이 하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머리 속에 깊이 새기셔야 한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여기 에스겔 36장 24절에 나오는 ‘너희’ 라는 존재들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역해서 이방나라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고향땅으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5장‘회개’의 주제에서 공부했다. 잃어버린 양을 누가 찾으러 왔는가? 그 잃어버렸던 양이 자기 발로 걸어들어 온 것이 아니다. 목자가 찾아갔다. 그리고 찾아서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왔다. 똑같은 얘기이다. 소위 ‘회개’라는 단어이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이다. ‘후회하고 고친다’ 라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돌아가는 것이다.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에 가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자가 양을 찾아와서 양을 찾은 다음에 어깨에 메고 돌아온 것처럼 죄로 인해서 노예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러 가셔서 찾으신 다음에 그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도 이 돌아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돌아오는 얘기를 하면서 예레미야 31장8,9절에 보면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그들이 자기들을 용서하시고 찾아오셔서 품에 안고 돌아가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여 울고 돌아온다는 얘기를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63장 9절에도 보면 “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그들을 안고 데리고 오셨다.
양이 자기발로 집에 돌아온 게 아니고 목자가 등에 업고 돌아간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용서의 어깨위에 메시고 우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다.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찾으신 다음에 우리를 용서하신 그 어깨위에 메고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믿음이다.
‘믿음’은 6장에서 공부 했다. ‘믿음’이란 본래 뜻이 ‘맡기는 것’이다. 제발 예수님의 용서의 어깨위에 맡기시길 바란다. 그분이 우리를 업으려 하실 때에 그리고 집에 가자고하실 때 제발 ‘이세상이 좋습니다. 돈이 좋습니다. 텔레비젼이 좋습니다. 골프가 좋습니다.’ 그 말 그만하시라. 텔레비젼도 좋고. 노는 것도 좋다. 그러나 더 좋은 세상이 있다. 더 큰 행복이 우리에게 있다.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의 가슴이 있다.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여전히 세상의 사탕 맛을 보고 있으면 그 영원한 꿀 같은 아버지의 사랑은 맛볼 수 없다. 돌아가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 ‘가자! 내 등에 업혀라’하실 때 제발 업히시길 바란다.
2단계- 죄를 정결케 하신다.
에스겔 36장25절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물로 정결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 돌아가면서 죄를 맡길 때 - 죄를 정결케 하신다.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이 물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수기 19장에 보면 전쟁이나 혹은 장례를 치르러 동네밖에 나갔다가 몸이 더러워져서 돌아올 때 반드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태워서 재를 만들었다가 그 재에다 물을 타서 뿌렸다. 몸에 3일째 7일째 뿌리고 마지막 날에는 온 몸을 목욕했다. 그렇게 해서 깨끗하게 된 다음에 들어왔다.
그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님에 대한 표상이다. 상징이다. 붉은 것은 죄 라는 것이고 암송아지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제물이다. 개인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는 양이나 염소를 잡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해서 짐승이 죽을 때는 반드시 소를 잡았다. 그러니까 모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이 이미 다 해결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재는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불에 태워져서 완전히 없어진, 죄가 완전히 없어진 하나의 영수증이다. 그것을 물에 타서 뿌린다. 정결케 하는 예식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피 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를 정결케 할 재료가 없다.
그런데 죄의 정결을 위하여 여기에다 온갖 것 섞어서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을 내라 어떤 봉사를 해라 등등... 아니다. 성소에서 양의 피 외에는 하나님께 드려진 게 없다. 양의 피하고 돈하고 같이 드린 적이 없다. 그런데 거짓 종교는 그렇게 해서 돈을 거둬드린다. 정말 통탄할 일이다. 절대로 아니다. 여러분 성경을 똑바로 보시길 바란다.
타고난 마음은 죗된 욕망과 거룩하지 못한 생각의 처소이다. 그 마음을 주께 복종시킬 때 그것은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더러움에서 정결케 된다. 이 일은 사람이 허락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같은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모든 죄의 충동들-사단이 나를 죄 짓게 하기위해 죄된 생각을 넣어줄 때 즉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넣어 줄 때, 시기. 질투의 생각을 넣어 줄 때, 섭섭한 생각을 넣어줄 때, 화를 나게하는 생각을 넣어줄 때, 식욕, 정욕, 색욕을 넣어줄 때, 죄된 욕심을 넣어줄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불순종으로 유혹할 때 .... 나의 관심과 시간을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에게로 옮기고자 할 때, 모든 죄의 유혹들, 나의 모든 죄악들과 함께 죄 자체인 나를 통째로 예수님께(성령께)맡겨야 한다- 인간의 몫은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2단계에서 3단계 사이의 필수 과정>
영성 훈련- 거듭남의 필수 과정 - 얍복강의 야곱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1.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는 훈련- 살 수 있고, 거듭날 수 있는 훈련이다.
2.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
3.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녹여내고, 통회하고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해 준다.
4.영성훈련의 결과로 은총과 간구의 성령을 부어주심-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애통과 통곡이 일어남-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림-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하신다.
죄 때문에 우리의 상태가 이상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능력은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인간의 심령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죄에서 정결함을 얻는다. 그의 은혜만이 우리로 타락한 본성의 경향들을 저항하고 굴복시킬 수 있게 한다.
1.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는 훈련-살 수 있고, 거듭날 수 있는 훈련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가? 아래의 성경말씀들과 같이 바라보아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린 바 되었으니 뱀에게 속고 물린 자마다 쳐다보면 살수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바라본다는 의미그의 생애를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의 말씀에 주어진 대로 그분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숨겨진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파내어야 하고,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착시켜야 한다... 바라봄으로써 변화되고, 품성이 완전하신 그분께 윤리적으로 동화된다.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통하여 그의 입혀주시는 의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같이 된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전 존재를 사로잡는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에 역사한 결과를 나타내 보이며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케 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목적의 단일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일찍이 이 세상에 살았던 자들은 모두 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계 12:9) 자의 치명적인 독아(毒牙)에 물렸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책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이 쳐들린 뱀을 쳐다봄으로 저들의 생명을 구원했다.
즉 죄인들은 속죄의 희생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다. 활력이 없고 생명이 없는 상징물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회개하는 죄인을 고칠 수 있는 능력과 효능을 가지고 계신다. 만일 뱀에게 물린 자들이 쳐다보기를 동의하기 전에 멈추어서서 의심과 의문을 일으켰더라면 그들은 멸망을 당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쳐다보는 일이 우리의 의무이며 믿음으로 쳐다봄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태양을 바라보듯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의 형상만 보임
그리스도께 마음을 쏟게 될 때, 품성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꼴 지워질 것이다. 생각은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식으로 압도된다. 우리는 그분의 품성을 명상하며,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 생각 가운데 계시게 된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감싼다. 만일 우리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한창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본다면, 우리 눈을 돌렸을 때, 태양의 모습이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 속에 나타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똑같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마다 그분의 형상, 의의 태양을 반영한다. 우리는 그 어느 다른 것도 볼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그분의 형상이 영혼의 눈에 새겨져서 우리의 일상 생애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쳐 우리의 전 본성이 부드러워지고 굴복하게 된다. 바라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에 일치하게 된다. 우리가 사귀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밝고 쾌활한 그분의 의의 광선을 반사한다. 우리의 품성은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마음, 영혼, 정신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신 분을 회상함으로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 감화력의 실현이 있게 된다.
2.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의 사랑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준다. 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을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함―예수님은 하늘에서 오는 빛과 십자가를 서로 일치하는 위치에다 놓으셨다. 이는 사람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 곳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춰 나오는 빛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고 알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죽기까지 그의 영혼을 쏟아 부으신 그분을 바라본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시야는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증오심을 바라보는 한편 우리는 또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진리요, 빛이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논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억지로 바라보도록 강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쳐다보면 살리라’는 초청의 음성은 간절한 탄원의 호소로 들려온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이 비할 데 없이 귀한 것이며 주님께서 범죄한 죄인의 자리를 택하셨고 죄인에게 당신의 흠없는 의를 입히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인이 자기의 구세주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죄의 저주 아래서
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를 사랑하신 까닭이며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신 구주이심을 죄인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갈바리’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 그대는 십자가를 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이다. 세상의 구속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세상의 구주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쳐다보고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마음이 녹아지고 깨어져서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 요지(要旨)가 충분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3.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녹여 통회하게하고 회개케 해 준다.그 때(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새명을 지어 준다. 사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심령은 우리들 속에 역사하시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다. 그 때에 하나님의 율법이 심령에 쓰여지게 되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시 40:8)나이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인간 속에 있는 고상하고 관대한 것은 무엇이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은 죄인을 하나님께로 “회개”하도록 인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도한다.
십자가를 연구하라.
갈바리의 십자가는 멸망해 가는 영혼들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안에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시며, 새롭고 살아 있는 생명의 원칙이 죄로 더럽혀진 마음속에 들어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모든 믿는 영혼들을 온전히 회복하고, 재건하고, 격려하고, 굳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연구되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를 고정시키고, 애정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 곳에서 죄를 위해 흘려진 보혈은 온갖 이기심으로부터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하고 깨끗이 씻어 줄 것이다.
십자가에서 공의가 만족함을 입었으므로 공의는 그 높고 두려운 위치에서 내려왔으며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거룩한 무리들은 십자가에 가까이 이르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인은 죄의 본거지로부터 떠날 수 있으며 악의 동맹한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매번 십자가에 접근할 때마다 그의 심령은 부드럽게 되어 그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나의 죄였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죄인을 티끌에서 일으키사 성령의 지도 밑에 두신다. 죄인이 구세주를 바라볼 때 그는 소망과 보장과 기쁨을 찾게 된다. 믿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영혼을 순결케 한다.
참 신앙, 곧 성경이 말씀하는 유일한 신앙인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가르치는 신앙,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옹호하는 신앙이 가볍게 취급되어 왔고, 거역하는 말을 들어왔으며, 어리석게 취급되었으며 거절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것은 성령에 의해 나눠줌을 받은 사랑의 활동적인 원칙이며, 이것만이 영혼을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것같이 그런 연합가운데 거할 때, 사단적인 기능을 통하여 지속되어왔던 이런 오랜 투쟁은 끝장날 것이다.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구속받는 자들의 과학과 노래가 될 연구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빛을 통해서만이 인간 영혼의 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죄 때문에 우리의 상태가 이상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능력은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인간의 심령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죄에서 정결함을 얻는다. 그의 은혜만이 우리로 타락한 본성의 경향들을 저항하고 굴복시킬 수 있게 한다.
4.깊은 영성훈련을 통해 은총과 간구의 성령을 부어주시고-나의 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애통하고 통곡하게 되고-그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고-새 영과 새 마음이 재창조 된다. 즉 거듭남이 이루어진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2:10,13:1)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게 되며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를 힘입을 때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며 그 능력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품성에 역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어 받음으로써만 죄의 가증한 정체를 분별하게 되며 마침내 죄를 영혼의 성전에서 쫓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고 구원의 사업을 위하여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게 되는 것도 오직 은혜를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라.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악한 것을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구주를 쳐다볼 때 즉 구주께로부터 빛이 우리에게 이를 때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1.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2.우리는 생애의 모든 행실을 더럽게 한 우리 동기(動機)의 이기적인 것과
3.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적의(敵意)를 깨닫게 될 것이다.
4.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과
5.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6.그리스도이 형상대로 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순결의 빛은
7.심령을 꿰뚫어 모든 오점(汚點)을 밝히 드러내고 사람의 품성의 결함과 결점을 폭로한다.
8.또 이 빛은 신성치 못한 욕망과 심지의 불신실과 입술의 불순결함을 명백히 드러낸다.
9.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함으로 하나님께 불충성한 죄인의 행실이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신의 감찰하시는 감화를 받아 찔림을 받고 통회하게 될 것이다.
죄가 심히 악하다는 사실은 다만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무 선하셔서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에 저들로 하여금 갈바리를 쳐다보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람을 구원할 별다른 방법이 없는 까닭이요, 또한 이 희생이 없이는 인류는 죄의 더럽히는 권세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자들로 더불어 교제를 회복하기 불가능-인류가 다시 영적 생애를 할 수 있는 자가 되기 불가능한-까닭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다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고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더욱 고상한 생애를 살 소망도 없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신44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죄악적 방종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신을 강하게 한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심은 바의 수확을 거둘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시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이다...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은 곧 그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라. 그러나 원수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는 것과 또 그대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라...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리운 줄의 길이를 볼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구속의 경륜과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셨다. 예수가 그 후에 하신 설교 말씀 가운데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역사를 그처럼 충만하게 단계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은 이외에는 없다
3단계 -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하신다
에스겔 36: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죄의 정결이 이루어졌을 때-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하심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물로 씻은 다음에는 에스겔 36장26절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셨다.
여기 영, 새 영 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새 영이라고 말한 이 '영'은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간단히 줄여서 말씀드리면 그것은 '새 종자' 혹은 '새 본성'을 가리킨다. 그 '새 영'속에서 '새 마음'이 올라온다. '영'과 '마음'은 다르다. 어떤 분은 영하고 마음하고 같이 섞어서 ‘심령’으로 번역하는데 성경적이지 않다. 영이라는 것은 본성이다. '본성' 그러니까 우리가 새 본성을 즉 예수님의 본성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 같은 마음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의 본성은 악의 본성이다.
시궁창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자연적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새 영을 받아야 새 영에서 새 마음이 나온다. 예수님의 본성이 내게 창조되어질 때이다. 이것은 창조이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회개하고, 수양하면 그 다음에 내 마음이 점점 착해지는 것이 아니다.
새 영이다. 새 영, 새 마음, 성경에서 ‘새’자가 붙은 것은 다 창조에 관한 얘기이다.
창조,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때 마다 새 노래, 창조의 노래이다. 새로운 창조의 노래, 너무 기뻐서 부르는 노래들이다. 새 노래 히브리 말로 '카다쉬' 라는 말인데 그것은 분명히 창조이다.
그러나 거짓 종교는 ‘성화’라는 주제를 앞에 내세워서 자꾸 ‘노력해라’ ‘극기해라’ ‘고쳐라’하는데 이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못 고친다. 모양만 바꿔지는 것이다. 본질은 절대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양의소리를 하지만 여전히 용의 태도로 하는 것이다. 양의소리를 양의 태도로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소리를 용의 태도로 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얘기한다.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는데 속에는 늑대가 앉아 있다.
그래서 새 영이 창조되지 않으면 새 마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아주 중요한 진리이다. 잊지 마시길 바란다. 창조이다. 이것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마음을 고쳐가지고 그렇게 살 수 없다. 마귀의 역사로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거짓이라는 것이 다 드러난다. 전혀 다른 새 영과 새 마음이 우리 안에 창조 된다. 이것은 아주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게 되며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를 힘입을 때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며 그 능력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품성에 역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어 받음으로써만 죄의 가증한 정체를 분별하게 되며 마침내 죄를 영혼의 성전에서 쫓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고 구원의 사업을 위하여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게 되는 것도 오직 은혜를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기의 대치물이시며 담보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4단계 - 성령을 우리 속에 두고 율법을 행하게 해 주신다
겔 36: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의 본능적 사랑, 곧 고린도전서13장의 아가페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이타적인 사랑, 자식에게처럼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사랑의 품성이 재 창조 됨- 거듭나면 2개의 본성 곧 마귀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짐-그러므로 더 깊은 회개와 더 풍성한 사랑을 경험 함. 거듭나지 않으면 마귀의 본성만 가지고 있다.
거듭남 이후도 계속 성령께 맡겨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다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에스겔 36장 27절“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눈을 똑똑히 뜨고 정확하게 보자.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요즘 새로운 번역은 ‘내 영’이라고 번역했다. 히브리 말로는 '루아흐'(ruach) 라는 말인데 영, 신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이다. ‘ 내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다. 중요한 얘기이다. 새 영속에 예수그리스도의 본성과 같은 성령이 들어오신다. 우리의 육신의 본성 즉 우리의 타락한 이기적이고 부패한 정욕적인 본성에는 마귀가 들어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처소라’ 그렇게 말할 때는 그 실제 자리가 어디인가하면 새 영이다. 여러분이 계속 성령을 달라고 기도 해 보라. 나중에는 악령이 들어온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아무데나 오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오시는 자리가 정확히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본성 그 속에 성령이 계신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을 달라면 반드시 악령이 온다. 교만의 영이 온다. 거짓 열심의 영이 온다. 거짓 방언의 영이 온다. 그것은 아주 정해진 법이다.
창세기6장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 6:3)는 말씀대로 그들의 마음이 이미 죄에 육신의 본성으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그 다음, 이 새 영과 새 마음에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시겠다고 하셨는가? ‘율법이 준수 되도록, 지켜지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다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 들어오신 성령이, 내 속에 창조하셨던 새 영과 새 마음 곧 자기 본성을 움직여서 그분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고, 다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3장5절에 말씀한 ‘물과 성령’은 본래는 영이다. 헬라어에는 ‘성’ 자가 본래 없다. 그런데 이 ‘영’ 이라는 말이 ‘성령’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뿐이다. 헬라어에 본래 그렇다. 그래서 ‘물과 영’ 혹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자기 속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율법을 지키신다. 그게 빌립보서 2장13절에 하셨던 말씀이다. 뭐라 그러셨는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우리속에 두고 율법을 행하게 해 주셨을 때 즉 거듭난 이후에도 인간의 몫은 계속 맡기는 일이다. 거듭난 이후에 성령께 계속 맡기지 않으면 거듭남을 잃어버린다. 뒤로 물러간다. 거듭남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교만해 진다. -인간의 몫은 맡기는 것이다. 믿는 일이다.
사업은 초대 제자들 당시 성령의 강림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같이 이 땅에서 마쳐질 것이다.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돌이켜 회개할 것인데 이는 기별이 능력과 더불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마음을 이끄는 주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나타나 계신다.
갈바리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 곧 극악한 죄로부터 양심을 각성시킬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율법과 관련시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충성되고 자비한 대제사장으로 제시해 오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거룩한 희생 제물로 죄인에게 제시되어 오지 않았다.
희생 제물과 대속물과 보증인으로서의 그분의 사업은 냉냉하고 어쩌다 가끔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죄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용서해 주시는 구주로서 그분의 충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굳어진 마음에 뉘우침과 회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5단계- 언약적 선언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
겔 36: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언약적 선언 -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약속이 성취됨.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마지막 말씀, 에스겔 36장 28절에 흔히 언약적 선언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게 마지막 결론이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아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앞에 과정이 소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즉 새 영과 새 마음이 창조되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에스겔 36장24절에는 그들이 이방의 노예들이었다. 이제 에스겔 36장28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신분이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흔히 말한다. 아니다. 죄송하지만 내용이 바뀌지 않으면 신분이 바뀌지 않는다. 거듭나야 신분이 바뀐다.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본성이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에 절대로 천국에 못간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말은 그가 아직 예수님 씨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솔직히 여러분 예수님보다 텔레비젼이 더 좋지 않은가? 텔레비젼 자꾸 얘기 하니까 지금 마음에 불편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 잘 믿으려면 예수님하고 같이 있을 시간도 부족한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텔레비전 뿐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그렇다. 어떤 사람은 테니스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 그래서 기도할 시간에도 테니스 친다. 왜 테니스 치는가? 재미있다. 예수 믿는 것 보다 그게 더 재미있다. 그러니까 기도할 시간에 테니스 친다. 골프 마찬가지이다.
정말 여러분들,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는가?그것 휴지처럼 그냥 대충 생각하다가 그냥 버려도 그만인 것처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소중하게 간직해야 된다. 누가 여러분 100억자리 수표 한 장 주었다면 얼마나 잘 보관하겠는가? 얼마나 늘 신경쓰겠는가? 얼마나 관심가지겠는가? 하물며 그것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겠는가? 영원한 생명, 나를 위해 주신 영원한 생명, 그 사랑, 그 용서 정말 잘 간직하기를 바란다. 우리 마음의 금고에 잘 간직해야 한다.
성화의 단계
성화의 과정-더 깊은 회개의 경험과 더 풍성한 사랑의 경험이다. 이 단계는 추후에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의 몫 - 반응하고 선택하고 맡기는 일이다. 믿는 일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마귀의 본성만 가졌지만 거듭남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마귀의 본성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에스겔 36장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 하신대로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실 때 ’ “굳은 마음”만 제거해 주시기 때문에 굳은 영, 곧 옛 본성은 그대로 있다.
거듭나기 전에는 마귀의 종자만, 죄된 본성만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죄가 얼마나 흉악하고 심각한지 알지 못하지만 거듭난 이후로는 새 본성 곧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이 창조 되었고 성령이 내재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마귀의 본성이 같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죄는 더욱 흉악하게 느껴짐으로 회개는 더욱 깊어지고 사랑은 더욱 풍성하여지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굴복하고 계속 맡기게 되면 성령으로 품성이 고정되어 환난을 통과할 것이다.
성경구절
- 에베소서 2장 8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에스겔 36장 24절
- 요한복음 10장 27절
- 요한복음 10장 3절로 4절
- 시편 77장 20절
- 예레미아 31장 3절
- 호세아 11장 4절
- 요한복음 10장 28절
- 이사야 41장 10절
- 요한계시록 1장 18절
- 이사야 54장 10절
- 요한복음 10장 14절로 15절
- 스가랴 13장 7절
- 요한복음 10장 16절로 18절
- 이사야 53장 4절로 6절
- 이사야 44장 22절
- 디모데후서 1장 9절
- 이사야 55장 7절
- 로마서 2장 4절
- 갈라디아서 1장 8절
- 예레미아 31장 8절로 9절
- 이사야 63장 9절
- 에스겔 36장 25절
- 요한복음 1장 9절
- 민수기 21장 9절
-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
- 요한복음 1장 29절
- 요한일서 3장 1절
- 요한계시록 12장 9절
- 스가랴 12장 10절
- 스가랴 13장 1절
- 디모데전서 1장 15절
- 에스겔 36장 26절
- 에스겔 36장 27절
- 창세기 6장 3절
- 요한복음 3장 3절로 5절
- 빌립보서 2장 13절
- 에스겔 36장 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