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미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산상수훈에 대한 두 번째 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19〜20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앞 절의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앞뒤의 말씀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자체뿐 아니라 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미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율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말씀’이라는 말에는 율법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싯적에 부모님 속을 한창 썩였던 자녀들이 나중에 부모가 되고 나면 부모님의 애타는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갖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을 가리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달라고 조르고 떼를 썼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아 길러보면 자식에게 사주고 싶어도 사주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됩니다. 자식이 지나가는 말로 “저거 갖고 싶은데...”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그것을 기억하고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부모의 심정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면서 읽으면 어떨까요?
요한일서 5장 3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냥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모든 계명을 더 지켜드릴 것이 없나 하고 살피면서 지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특히 이 말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본능적인 사랑이 사랑의 율법을 지키게 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려 따르는 자식을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효자일까요? 부모님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자가 효자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 좀 그렇지만 제 아버님은 효도가 당연한 도리라는 이유로 그 옛날 효자상도 거절할 만큼 마을에서 효심으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효심이 가득한 아버지셨지만 정작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임종을 지키지 못하셨습니다. 부고를 듣고 달려오셔서 할아버지의 시신 머리맡에 앉으셔서 소리도 못 내고 ‘끅끅’ 우셨다고 합니다. “내가 그때 너희 아버지 눈에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눈물을 봤단다.” 그때를 회상하시며 이따금씩 어머니께서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심지어 방바닥에 시뻘건 핏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제가 칠 년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여러모로 잘 모시고 싶어 노력을 다했지만 아버지의 효심에 비해 저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저 대신 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제가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월급이 적어 형편이 넉넉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맛있는 음식이나 변변한 식사 한 끼를 마음 놓고 대접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육지에서 온 손님 한 분이 귀한 김을 한 톳 갖다 주셨습니다. 당시 형편에 김은 구경하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아내가 김을 신문지에 싸서 그 다음 주에 오기로 되어 있는 부흥강사를 위해 보관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웬일로 아버지께서 식사하시다 말고 “반찬이 이게 뭐냐?”며 며느리에게 평소 하지 않으시던 반찬 타박을 하셨습니다. “얘야, 김 있지? 그거 좀 가져오렴.” 아내가 김을 잘 구워 갖다 드렸더니 무뚝뚝하게 제 앞으로 쑤욱 밀어 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그렇게 허구한 날 김치찌개만 해먹으면 영양실조 걸려 죽는다. 이거라도 좀 먹어라.”
당시 제 아들이 5살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니까 할아버지와 아빠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 앞에서 도저히 그 김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묘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아, 효도란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인 제가 그 김을 먹고 건강하게 생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김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 어떤 때보다 배가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조금이라도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 앞으로 쓰윽 은혜라는 밥상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듯이 십자가의 복음도 함께 주시면서 “내 용서와 내 사랑을 받으렴.”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며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효자 중의 효자이셨던 예수님께서 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장 18절)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아버지가 계신 집입니다.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뿐입니다. 아버지와 유전자가 같은 친자(親子)가 아니면 그 마당에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친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요한복음 3장 3절에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아버지의 유전자로 다시 거듭나는 것뿐입니다. 이 뜨거운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끼고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19〜20절
- 마태복음 4장 4절
- 요한일서 5장 3절
- 마태복음 5장 18절
- 요한복음 3장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