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

by blogmaster posted Nov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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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이 세상의 수많은 노래와 글 속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넘쳐나지만 이번 글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헬라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에로스’와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가 특히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로스(ἔρως)’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행복이나 만족을 뜻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지식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에로스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는데 에로스가 딱 그런 욕망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필리아(φιλία)’는 흔히 친구 간의 ‘우정’을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를 넓은 개념의 ‘형제애’로 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끼리 만나서 밥 한 끼를 얻어먹었다면 다음번에는 먼저 얻어먹었던 친구가 자기에게 밥을 사 주었던 친구에게 밥 한 끼 사주게 되는 것처럼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필리아’라고 합니다.

세 번째 ‘아가페(ἀγάπη)’는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아가페는 한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다 쏟아 붓는 사랑입니다. 받을 것을 예상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 베푸는 사랑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에 해당합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ἀγάπη)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왜 ‘아가페’ 사랑인 것일까요? 그것은 죄를 지은 우리 인간들이 소멸되지 않고 영생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면서 아들까지 아낌없이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거저 다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배필로 주시며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제 모친께서 저를 결혼시켜 놓고 며느리에게 보내신 편지 속에서 “너희들이 사는 쪽만 쳐다봐도 이렇게 마음이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마음이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며 그분들의 인생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네 어머니들은 오직 자식만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당신은 굶어도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만 봐도 배부르고, 아픈 자식의 펄펄 끓는 이마 위에 밤새 물수건을 갈아 놓으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사랑,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히브리어에 ‘토브(טוֹב)’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고 외치시는 마음이 바로 선함, ‘토브’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은 ‘다 주시는 사랑의 기쁨이 하나님께 충만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의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부자 법관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이는 한 분이시니”라고 되물으십니다. 그때 사용된 ‘선하다’는 말이 바로 이 표현입니다. ‘사랑의 완전함’과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사랑’을 성경은 ‘선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 주시는 사랑의 행복이 얼마나 선한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 주는 사랑의 행복을 ‘선’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다 주지 않고 따로 내 것을 챙기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무궁한 사랑! 영원한 사랑! 그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냈을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무궁한 사랑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영원한 하늘나라를 주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묘사하기에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이에도 때로는 마음이 상하고 서로 싸울 수 있습니다. ‘님’이 ‘남’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시간이 가도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불효를 하고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파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식물인간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 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도 부모는 그 사랑을 포기할 줄 모릅니다. 영원한 사랑! 누가 감히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부모 자식도 헤어져야 합니다. 영원한 사랑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사시는 영원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기 위하여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부모들도 자식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자식을 끝까지 돌보고 싶어서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시는 존재이신 것은 이렇게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의 가슴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이사야 9장 6절“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 그 이름은 영존하신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차마 자식의 죽음을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대신 죽어 자식을 영원히 살게 하는 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기에 자신을 자식 대신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뜻’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기서 ‘뜻’은 본래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뻐하시는 뜻’은 ‘기쁜 소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렇게 기꺼이 자신의 ‘뜻’으로, ‘소원’으로 영원한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영원히 살아 계신 것처럼 그 아버지의 사랑 역시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영원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경험을 날마다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일서 4장 8절
  • 로마서 8장 32절
  • 마태복음 19장
  • 예레미야 31장 3절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 이사야 9장 6절
  • 이사야 53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