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는 것
이번 시간부터 ‘은혜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10장부터 11장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0장부터 11장 사이에 나타난 말씀은 앞에 나타난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로마서의 집대성 부분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 말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안타깝게도 여기 ‘율법의 마침’이라는 단어는 많은 이들에게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율법의 마침을 율법의 무용지물로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마침’이라는 단어는 ‘끝’을 의미하는 ‘텔로스’로 쓰였습니다. ‘율법의 마침’, 즉 ‘율법의 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텔로스를 ‘끝’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장 20절) 텔로스는 율법의 행위로 이루는 의의 마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밖에는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텔로스를 ‘목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목적론(目的論)’을 ‘텔레올로지(teleology)’라고 말합니다. 목적론은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자연의 현상에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입장으로 ‘의자’가 존재하는 건 ‘앉기 위함’이라는 목적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덕적인 율법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결국 율법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를 충족시키고 완전히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텔로스를 구약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사실 구약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예수님이 없이는 어떤 율법의 의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이 모든 의에 완성이시고, 또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분명 바리새적인 율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바리새적인 율법의 행위들은 바울이 ‘의문(儀文)’이라고 표현한 모든 행위가 포함됩니다. ‘그람마(γράμμα)’, 즉 ‘글자’와 ‘문자’를 따라서 율법의 의를 이루려고 했던 모든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장 20절).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능적인 사랑, 자동적인 율법의 행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심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된 본성과 죄의 모든 결과를 가져가시고 당신이 사셨던 본능적인 사랑의 의를 우리에게 통째로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장 6절)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완전한 생애를 우리가 산 것처럼 인생의 장부에 넘겨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을 우리 안에 다시 심어주시고 성령의 은혜로 길러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화되었다.’, ‘완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값진 경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가슴 아픈 지적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로마서 10장 3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온전히 이루신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의를 티끌 속에 묻지 않고, 자꾸만 자기 자신의 알량한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맡기는 방법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10장 4절
- 로마서 3장 20절
- 마태복음 5장 20절
- 고린도후서 3장 6절
- 로마서 10장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