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
몸에 이상한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진단한 다음 큰 병에 걸렸으니 꼭 수술을 통해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살라고 권합니다. 자기가 큰 병이 걸렸을까봐 병원에 가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분들이 주변에 계십니다. 실지로 그런 이유로 정기검진을 등한히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의 병만 키울 뿐입니다. 의사는 병을 진단하는 역할을 할뿐 병을 치료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율법과 같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존재입니다. “큰 병에 걸렸다.”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수술하고 살라.”고 우리에게 사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 자기들을 정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괜히 부정적인 감정을 갖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일 뿐,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의사가 병과 상관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7장 13절)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구원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율법은 강합니다. 절대적입니다. 흔히 율법이 아주 어렵고 두려운 것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본성에 팔린 우리가 잘못된 것이지 율법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14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의 이야기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율법이 죄냐?”라는 문제를 놓고 바울은 율법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코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고 또 율법을 지키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로마서 8장 7절)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서 7장에서 ‘이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로마서 7장 6절) 이 ‘이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이제라는 단어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 7장의 경험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의 모습, 소위 회심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누니(νυνί)’로 썼는데 ‘바로 지금’, ‘현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장 17절) 여기 다시 ‘이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17절에 나타난 ‘이제’라는 단어 역시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의 본성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5〜18절) 육신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는 ‘싸르크스(σάρξ)’라고 합니다. 원래는 고깃덩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의 본성’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 속, 우리의 세포 속에 가지고 있는 죄의 유전적 본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변질된 유전적 본성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울부짖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바울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응시하며 졸도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도, 회심 후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더 깊이 닮아가고 성화되어가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될 말씀은 2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본래 일반적으로 쓰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들어 있는 부분인 마음을 나타날 때는 헬라어로 ‘카르디아(καρδία)’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절의 마음은 ‘누스(νοῦς)’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특별히 도덕적인 판단력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의지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누스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에는 ‘이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은 회심 직전에도, 회심한 후에도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상태에서 도덕적인 판단력이 새롭게 되고 깊어질 때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성경절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7장 13~14절
- 로마서 8장 7절
- 로마서 7장 6절
- 로마서 7장 15〜18절
- 로마서 7장 24~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