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이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얘기로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 역시 목자의 마음과 똑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로부터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동구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본 사람 있으면 연락 좀 달라.”고 동네방네 광고를 내고 전단지를 붙이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집에 돌아 온 과정을 좀 보겠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야기를 이렇게 정확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누가복음 15장 17절)
아들은 집에 돌아가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 자기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동안 세상 쾌락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술과 돈과 여자에 취해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탕자는 천만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사람은 세상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섰을 때만큼 자신에게 정직할 때가 없습니다. 탕자가 바로 그 입장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정말로 객지에서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기가 아버지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둘째, 아버지에게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많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술 먹고 한창 못된 짓 할 때도 가끔씩 고향의 아버지 소식은 듣고 있던 터였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병이 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고 계시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잠시 정신이 들었을 뿐 다시 세상과 벗하며 즐기고 놀기에 바빠 금세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그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아버지 집이 아니라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돌아가도 아버지가 문전박대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품을 떠올린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회개의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몽둥이 들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들이 아버지한테 절대로 안 갔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갈 힘조차 염치조차 없는데 가서 괜히 두들겨 맞아 죽으려고 가겠습니까? 이처럼 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께로, 나를 용서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그 아버지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때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용서의 품으로 돌아갈 때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가슴으로 돌아가는 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회개의 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