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성경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여기서는 율법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과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지식의 나무로 불렸던 선악과는 율법을 가르쳐주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셨지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실제로 가르쳐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율법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은 단순한 경고 이상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의 발로였다는 사실입니다. 식탁 한 가운데 제초제가 담긴 병이 놓여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이거 마시면 틀림없이 죽을 거야.”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아이가 제초제를 먹고 죽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경고이며, 그 이면에는 아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모두 사랑이 전제된 표현입니다. 말씀을 준 동기도 사랑이고 그 내용도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게 힘들고 귀찮다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이미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6절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았을 때,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고 했을 때 아담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늘어놓는 이야기는 변명과 핑계들뿐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좋아서 죽을 것 같았던 아내에 대하여 이제는 그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여자를 보고 자신의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저 여자 때문에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마귀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고 대적하는 편에 섰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장 23절)이라고 말합니다. 사망은 존재가 죽어서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장 28〜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돌려보내신 이유가 그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됩니다. “에이 못된 놈, 너 오늘부로 없어져 버려라.” 그렇게 못하시는 아버지입니다. 판사나 검사, 경찰 아저씨는 “에이 못된 놈, 천벌을 받을 놈아!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살아서는 안 돼. 사형시켜버리겠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아이를 낳은 아버지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못난 자식이 죄를 짓고 그만 사형을 당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식 대신 매를 맞으려고 아버지께서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대신 매를 맞다가 벌을 받고 사형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죗값을 다 갚기 때문에 이젠 다시 부활시켜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래대로 죄 없는 몸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원점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미 죄로 망가졌기 때문에 병들고 죄 있는 몸으로 영원히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 쓰는 그릇을 깨버려서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토기장이와 같습니다. 버려져서 산산이 깨지는 그릇이 처음에는 주인을 원망하고 토기장이를 오해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온전하고 더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다면, 도리어 일찍 자기를 깨어달라고 나설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