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난다’는 의미
‘거듭남’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같은 상태의 다른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생물학적 표현이고, ‘의’는 법적인 표현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표현인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 착해지고 선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변화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거듭난다는 건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요한복음 8장 23절)고 말합니다.
이 말씀 중에서 ‘위에서 났다’는 표현은 실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태어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생지가 하늘이라는 뜻이 아니고 타락한 죄인들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으로 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나신 분입니다(마태복음 1장 18절). 그분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본성으로 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에게서 육체적 연약함과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퇴화된 상태를 취하셨지만,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능적 사랑의 본성’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신학적 신비입니다.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하는 말을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타락한 결과로 얻어진 연약함을 가지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분 속에는 성령의 본성, 하나님의 참을 수 없고 본능적 사랑의 본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니신 생각의 구조가 우리 죄된 인간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자나 깨나 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할 것인가 하는 일념으로 사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본성(nature)’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속에는 음욕이나 탐욕, 재물욕 등 죄의 욕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욕심을 품고 있었다면 그분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거듭나야 할까요?
김 씨 집안에 태어났는데 박 씨 집안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얘기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혈통이 아니라 우리의 성정이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 3장 5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과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종자가 바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에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본성 없이 내 것 먼저 쓰고 남은 것 좀 주고 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남을 먼저 주고, 남을 다 주고, 남을 더 주는 마음이 바로 거듭난 것입니다. 죄로 인해 들어온 마귀의 유전자가 죽고 하나님의 유전자, 하나님의 씨로 다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직접 말씀하신 거듭남(요한복음 3장 3절)이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5절).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창조 때 받은 하나님의 형상, 이타적 사랑의 본성,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라는 표현은 본래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셨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셔야만 됩니다. 현재 내 속에 있는 철두철미한 이기심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