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언부언(重言復言)’
지난 글에 이어서 마태복음 6장 7〜8절의 말씀을 계속 보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 ‘중언부언(重言復言)’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말을 할 때 어떤 말은 반복해서 하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간절하거나 상대방이 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 번 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기도를 한 번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장황하게 기도함으로 마치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바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했다’는 생각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혹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심정으로 새벽같이 정한수를 떠놓고 빌면서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하나의 업적으로 느껴져서 ‘이쯤 했는데 안 들어주시겠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금식기도 한번 했다고, 새벽기도 몇 번 했다고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면 이 세상에서 구원 못 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느니라 ~”(로마서 11장 35〜36절)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의 거래 법칙으로 보아도 구원과 기도를 맞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도 싸구려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거래가 성립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시장에 가서 천 원어치 물건을 달라하면 천 원어치만 주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상인이 인심이 좋아서 혹여 한두 개 덤으로 더 줄 수는 있어도 천 원어치 사는데 천만 원어치를 주는 그런 정신 나간 장사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천 원짜리 정성과 열성을 바친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천만 원짜리 구원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과 관련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엘리야의 갈멜산 사건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자들에게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 기도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자는 단판 승부를 제안합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엘리야는 단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게 했지만,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6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다가 나중에는 칼을 들고 자기들의 몸을 그어가며 자해하는 소동까지 벌였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믿으면서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열왕기상 18장 26절) 이에 엘리야는 이렇게 힐난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27절)
마태복음 6장 8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자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버지가 모르실까요?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죄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기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능이 없습니다. 아무리 유창한 기도를 드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무익한 말장난과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6장 7〜8절
- 로마서 11장 35〜36절
- 열왕기상 18장 26절~2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