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목하라

by blogmaster posted Aug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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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완전히’ 상대방을 용서하라

사단은 어떤 존재일까요?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사단을 두고 ‘참소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참소(讒訴)’는 남을 헐뜯어 죄를 고해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참소는 사단이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동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제일 잘하시는 반면에 사단은 사람과 하나님을 공격할 때 언제나 비방과 참소라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들 앞에서 결코 성질을 내거나 위협하는 말씀을 입에 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장 7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단의 입에는 증오와 불평, 중상모략과 정죄, 힐난과 책망이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영락없이 이러한 사단을 닮았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려 할 때 그는 힐난하듯이 따졌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누가복음 15장 29〜30절) 큰아들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아버지를 닮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눈엣가시 같았던 자신의 동생을 수도 없이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490번’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7이라는 숫자를 완전수로 여겼기 때문에 70에 7을 곱한 수만큼 용서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용서해준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7은 ‘일주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7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일몰, 한 달은 달의 삭망, 1년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기간을 구분했지만 일주일은 기준으로 삼을만한 천체의 변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기간입니다. 따라서 7이라는 숫자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 째날, 여섯 째날, 일곱째 날을 모두 아우르는, 즉 ‘매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매일’ ‘완전히’ 상대방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장 11절)는 정신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목적은 죄를 그만 두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4절에 위대한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는 예배라는 것을 그저 함께 모여서 경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형제와 화목하고 용서를 나누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화목과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흥미로운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그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 가서 멱살을 잡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게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주인의 은혜를 입어 일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 받고도 정작 자신에게는 ‘껌 값’에 해당하는 백 데나리온을 빌린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구치소에 가두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일의 전모를 들은 주인이 그를 불러 이렇게 꾸짖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마태복음 18장 32〜34절)

주님께서 염두에 두신 의미는 명백해 보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갚아주신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인간관계에 앞서 가장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용서를 기억할 때 나에게 사소하게 잘못한 친구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를 받은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도 용서받은 자들이 그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서 예배드리기 전에 너의 형제와 먼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헬라어는 재미있게도 ‘바꾸다’, ‘교환하다(exchange)’라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탈라쏘(καταλλάσσω)’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각자의 잘못을 내어놓고 서로의 용서와 교환할 때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명절 같은 날에 부모님 집에 모인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가 돈독하면 부모님께 큰 기쁨이 되지만 형제간에 불목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으면 함께 모여 송편을 빚더라도 부모님의 마음은 너무나도 슬플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내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예배 그 자체가 심히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길뿐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계시록 12장 10절
  • 이사야 57장 7절
  • 누가복음 15장 29〜30절
  • 요한복음 8장 11절
  • 마태복음 5장 24절
  • 마태복음 18장 32〜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