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오늘부터 연구할 주제는 로마서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신학입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행동의 상태를 말한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이면서 바울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장 28절) 이 말씀은 당시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을 추구했던 유대인 사회에 어쩌면 폭탄과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시도하는 일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을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립보서 3장 5〜6절)고 소개할 정도입니다. 소위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런 열심 있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당당히 선언한 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다 보면, ‘율법의 행위’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행위(deed)’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르곤(ἔργον)’이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도 몇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같이 ‘인간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모든 행동’을 가리키는 용례로 쓰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신약성경에 등장한 예가 바로 로마서 2장 14〜15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계명이 없는 이방인들도 마음에 하나님이 새기신 율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로마서 2장 15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실 때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도 그랬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다음에 인간의 마음에 넣어 주셨던 언약은 하나님 마음에 있던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따로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다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본능적인 사랑의 원칙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고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에게도 동일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죄에 의해서 완전히 뒤틀어졌습니다. 원죄로 인해 우리는 마귀가 잉태한 어둠의 자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한복음 8장 4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장 60절) 기도하며 죽었고, 모세도 희망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애굽기 32장 32절)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그들의 죄와 맞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 본능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데반과 모세의 마음에 넣어주신 이타적 정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쓰인 ‘완전케 하다’의 원어는 ‘플레로오(πληρόω)’라는 헬라어 동사입니다. ‘플레로오’는 빈 컵 안에 물을 ‘가득 채운다(fulfill)’는 뜻입니다. 그것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7장까지 계속된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 즉, 본인의 이기심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고 행하는 사랑인 본능적인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행위의 율법들은 도그마(dogma)이며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로마서 3장 21절)고 말합니다. 여기 ‘율법’이라고 하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있는데, 앞에 나온 ‘율법’이라는 단어는 로마서 2장 21절에 나오는 도덕법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3장 21절 중간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말한 그 율법’이라는 단어는 구약, 특히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는 바울이 새로 만들어낸 의가 결코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 예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질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슬픈 사실을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장 3절) 인간이 율법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율법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죄인은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채무불이행인 것입니다. 죄인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십니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두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로마서 3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이 부분에 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5절) 유명한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장 7절) 약속하셨습니다. 창녀 마리아를 주님께서 용서하시면서 마리아가 주님 앞에 바친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누가복음 7장 47절) 사랑과 죄 사함의 함수관계를 말씀하시며 많이 용서받은 자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50절에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께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속절없는 사람들이며 희망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배은망덕한 본성을 버리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용서의 손을 내미시며 우리의 죄로 가득한 인생을 다 맡기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에 감사하며 의지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3장 28절
- 빌립보서 3장 5〜6절
- 로마서 2장 14〜15절
- 요한복음 8장 44절
- 누가복음 23장 34절
- 사도행전 7장 60절
- 출애굽기 32장 32절
- 마태복음 5장 17절
- 마태복음 5장 21절
- 로마서 3장 21절
- 로마서 2장 21절
- 로마서 3장 22절
- 요한복음 15장 5절
- 요한복음 15장 7절
- 누가복음 7장 47절
- 누가복음 7장 5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