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단어
지난 시간 말미에 말씀드린 ‘믿음’이란 단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 머리로 인정하는 지적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마귀도 믿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원을 낳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마귀의 믿음은 결코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오로지 머리로만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인정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믿음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장 23〜24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믿음은 히브리어로 ‘아만(אָמַן)’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동사의 본래 뜻은 ‘든든하게 해 주다(confirm)’, ‘맡아서 기르다(support)’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다’는 말로 번역될 때는 사역형인 ‘맡기다’, ‘의탁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됩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문장을 히브리어로 직역해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속에 맡기도록 했다.’는 식의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이란 단어를 읽을 때에는 믿음 대신에 ‘맡김’이라고 읽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3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본성 그 자체를 죄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죄를 짓다’는 말을 할 때 ‘하타(חָטָא)’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 단어는 ‘과녁에서 빗나가다(miss)’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딱 맞아야 하는데 빗나간 것입니다. 죄와 관련된 또 다른 단어는 ‘파샤(פָשַׁע)’인데, 이 단어는 ‘누구에게 등을 보이다(turn one’s back)’ ‘반역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이사야 1장 4절에는 인간의 내재적 죄가 얼마나 깊은지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성경은 우리의 종자(種子)가 악의 종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전자 자체가 부패한 죄악의 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오해하여 자신들의 율법을 기준 삼아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규정해왔습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자기들이 앉은 꼴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본성적인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을 표현한 율법의 본질, 바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서푼짜리 도덕심과 주관적인 신앙의 잣대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재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픕니다. 특별히 신앙이 출중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비치는 영적 우월감과 신앙의 자랑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의와 한참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앙의 기준이나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남들을 비난하는 모습은 우리 내부가 얼마나 죄악으로 깊이 물들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신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견디실 수 없었던 그분의 사랑에 등을 돌리지 말고 우리 존재를 내던지는 경험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야고보서 2장 19절
- 요한복음 2장 23〜24절
- 로마서 3장 10절
- 이사야 1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