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중심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 6장 9절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주기도문은 오늘이라고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주기도문이다. 내일이 아니다, 현재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하늘’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주의 중심, 다시 말해 우주의 주인으로서 계시는,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땅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이 우주에 계시는, 우주 중심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물론 이 하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의 대기권도 하늘이라고 말한다.
하늘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우리 코앞에 공기가 와 있다. 이것도 하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여”는 우주를 통치하시고 움직이시는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지구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 아버지! 이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갑자기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이미 구약에 그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칭호가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있다.
이사야 63장 16절을 보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태초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기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당신은 영원 전부터 태초로부터 우리 아버지시라, 우리 구속자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속자라는 표현은 아들의, 딸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해결하시는 아버지로서의 구속자이시다. 그것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영원히 계신 자, 영원하신 아버지로서 그런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아버지이시다. 이 ‘우리’라는 말씀 속에는 엄청난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곧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우리이다. 이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안에 있는, 우리 모든 하늘 아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언급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주에 타락하지 아니한 천사들과 그리고 타락하지 아니한 인간들이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욥기 38장 7절에 이 지구가 창조 될 때에 그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노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늘 아래 온 우주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천사들과 그리고 타락하지 아니한 우주거민들 그 모든 자들과 비록 타락했지만, 이 지구상에 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같은 찌그러진 깡통 같이 완전히 퇴화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영국의 한 젊은 청년이 이슬람 IS라고 부르는 그 이슬람 폭력 조직에 현혹이 되어서 자기 나라 영국을 떠나서 어디론지 없어졌다. 처음에 사람들의 목을 직접 참수하는 장면을 찍은 그 동영상에 세계를 향해서 IS를 소개하는 말을 했던 청년이 바로 그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 동영상을 잠깐 본 일이 있는데 어쩐지 영어가 아랍 사람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가 아주 부드럽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영국식 영어였다. 그 영국식 영어를 하면서 서방 세계를 향해서 그렇게 위협을 하는 그 청년이 몇 차례 나왔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에 그 청년의 어머니, 아들이 나간 뒤에 아들을 찾던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쓰면서 저 아이가 분명히 내 아들이라고 아무리 얼굴을 가렸을지라도 분명히 자기 아들의 목소리였다. 형상이 똑같다고 했고 제발 내 아들을 찾아 달라고 했다.
얼마 후에 그 사람은 다시 동영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어머니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찾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는 그 조직으로부터 탈출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확실하지는 않다. 가슴 아픈 이야기다. 여러분, 그 IS 대원이 되어서 사람을 무참히 목을 베던 그 청년이 여전히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더 위로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심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의 아버지라고 한다. 나를 살려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내게 영생을 주시는 그런 나의 아버지! 그런데 바로 그 잔인한 IS 대원의 어머니가 내 아들이라고. 여러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비록 잘 몰라서 잔인하게 목을 그렇게 베어버리던 그 청년이 여전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는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참 저며 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고 죄인이고 죽어야 될 인간이고 천인공노할 인간이라고 아무리, 아무리 그렇게 말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내 아들이요 우리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 사람을 창조하시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다. ‘우리’라는 말을 반복하고 계신다.
그렇다, 원래 창조 되었던 아담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그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 세 분의 사랑의 하나 됨의 열매였다. 사랑의 열매! 창세기 1장 26절 ‘우리’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분이 서로에게 자기를 주셔서 사랑으로 하나 된 모습이다. 그게 아담이다, 원 아담! 갈빗대 빼기 전의 아담이다.
‘우리’라고 하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 엄청난 의미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들이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우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 서로에게 자신을 다 주셔서 하나가 되었을 때 완전한 연합이다. 그 열매로 나타난 것이, 우리 되신 하나님이 서로 한 덩어리 그 결정체가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그 안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말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만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대답 하시는 것도 아니고 성령 하나님만 대답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세 분이 동일하게 대답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다 형제이다. 사람은 모두 다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린 다 형제자매들이고 그 사실을 알려 주었을 우리의 조상들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우리 조상들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한 핏줄에서 한 아버지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전해 줄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슬픈 이야기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부모도 우리를 지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를 위해 호소하시는 것처럼 열렬하고 간절한 호소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사형당하시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돌아가실 필요가 없는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를 지고 돌아가실 때에 우리를 위해서 통곡을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셔야만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식들을 위해서 다시 사실 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시고 울며 통곡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식을 위한 길이다. 우리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기로 한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6장 9절
- 이사야 63장 16절
- 욥기 38장 7절
- 창세기 1장 26절
- 히브리서 5장 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