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by blogmaste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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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목적

다시 한 번 아모스서 4장 9절,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서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목적이 그들을 돌이키시기를 원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아픈 가슴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아모스 4장 10절 말씀을 보면 또 한 번의 재앙을 내리신다.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매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더 아픈 매가 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의 가슴이 점점 더 아프고 점점 그 고통과 아픔이 심해지고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아모스 4장 11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멸망을 시킨다고 말씀하신다. 

성읍을 다 무너뜨리고 불에 타게 하고 조금 배고픈, 물이 없어서 목마른 그런 정도가 아니다. 점차적으로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망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망하게 하는 것,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성읍이 불 가운데 탈지라도 그 가운데 불타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아픈 가슴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흔히 사람들이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저주를 끊어라, 그런 표현은 죄송하지만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저주가 아니다! 저주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갔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서 저주를 받으셨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우리에게 남겨준 저주와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우리를 매를 때리셔서라도 하나님의 아픈 사랑의 가슴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고통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멸망의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은혜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는 완고한 불신과 교만이다, 고집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 발 씻김을 받을 때에 돌아올 뻔 했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완고한 고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돈의 욕심과 함께 목을 매어 죽고 만 것이다.

돈과 하나님을 비교하신 이유

마태복음 6장 24절에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 두 주인은 분명히 돈과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왜 수 많은 죄 중에 왜 이렇게 돈과 하나님을 비교하셨을까? 이 돈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탐욕이다. 이 탐욕은 우리 중에 가장 널리 펴져 있는 죄이다.

어떤 사람은 음욕이 강해서 자기 조상 때부터 너무 못된 짓을 해서 타고난 유전자가 여자를 좋아하게 만들어 놨다. 혹은 남자를 좋아하게 만들어 놨다. 너무 불쌍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도 음욕이 불붙듯 하면 차라리 결혼하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러나 명예욕, 음욕 각종 욕심들이 있다. 탐욕, 식욕 등등 많이 있다. 그런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욕심이 돈에 대한 욕심이다. 탐욕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욕이란 말, 욕심이란 말을 아주 많이 쓰고 있다. 물론 욕심이 여러 분야에 다 적용이 되겠지만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이 많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야고보서에 기록한 것처럼 돈을 사랑함이 정말 모든 일만 악의 뿌리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 즉 사망을 낳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표현하는 이 죄라는 개념은 다시 이야기하지만 빗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빗나가서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돈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겠다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돈이면 돈,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을 보자, 그들이 부자였다. 그들이 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돈을 섬겼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욥이 돈이 다 없어졌다. 재산이 다 없어졌다. 자식도 없어졌다.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우리 한글 성경은 그 번역이 그렇게 안 되었지만, 사본이 달라서이다.

킹 제임스 성경, 옛날 구 사본이다. 그 사본에 의하면 욥기 13장 15절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우리 개혁 성경 번역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이것은 다른 사본에서 번역한 것이다.

킹 제임스 번역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욥이 의지한 것은 분명히 재물이 아니었다. 돈이 아니었다. 그가 동양에서 그 당시 최고의 부자였다. 아마 욥이 섬겼던 것이 돈이었다면 욥은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만 가져가신 것이 아니다. 이제 목숨도 가져가시려고 한다. 자식도 다 가져가셨다.

그런데 욥이 한 말은 “그가 비록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죽이실지라도 의지할 것이라고! 이 믿음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살아생전에 그는 얼굴을 대면해서 하나님을 본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다니엘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난다, 다니엘 10장 5절 6절. 예수님 제자 요한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뵈었다, 요한 계시록 1장 13로 16절.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는다, 이사야 6장 1절로 8절. 성경에 선지자들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예언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말씀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말하였더라고 하였다. 

욥기 42장 5절 6절에 보면 욥이 마지막으로 받은 축복이 나온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얼굴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본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죄인은 죽어야 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절대로 사랑을 볼 수 없다. 우리 죄로 인해서 반드시 죽어야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용서했다는 표현이다. 욥이 자기를 하나님이 혹시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돈과 재산 건강 생명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리라! 그의 믿음대로 되었다. 그는 비록 죄인이지만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으로써 하나님 얼굴을 뵙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는 증거가 바로 욥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이었다.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을 뵌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회개하여 그 사랑에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던지는 회개가 일어난다. 믿음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돈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중간 지대도 없다는 것이다. 결코 없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 발은 돈에, 한 발은 하나님 편에 이렇게 절대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요한 계시록을 읽다 보면은 사단이 사는 동네가 있다. 사단이 보좌를 차려 놓고 앉아서 통치하는 구역이 있다. 그것이 어디인가? 중간지대이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중간지대가 있다. 여기에 마귀가 보좌를 펼치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마귀가 앉아 있는, 마귀의 위가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중간지대이다.

왜냐하면 이미 마귀 편에 속해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 백성이므로 건드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완전히 붙어있는 사람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중간에 있는 사람은 마귀가 얼마든지 당기면 따라 오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마귀가 보좌를 베풀고 앉아 있는 자리는 자기 백성이 우굴 거리는 저 세상이 아니고, 돈도 하나님도 같이 겸해서 섬기는 분들 가운데 마귀가 너털웃음을 웃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내꺼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교회는 다닌다고 하지만, 신앙은 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마귀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을 뻔 하다가 멸망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를 다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욕심과 탐욕과 이기심을, 교만을 완전히 우리 주님의 용서의 사랑에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죄가 우리를 멸망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의 죄가! 용서받지 않고 끝까지 버리기를 거절하는 그 고집, 그 죄는 결국 우리를 멸망시킨다. 가룟 유다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에게 온전히 다 통째로 맡기시게 되기를 바란다.

성경구절

  • 아모스서 4장 9절로 11절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고린도후서 5장 21절
  • 마태복음 6장 24절
  • 다니엘 10장 5절 6절
  • 요한 계시록 1장 13로 16절
  • 이사야 6장 1절로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