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기도
마태복음 6장 5절로 7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들이 나타난다. 이 기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할 이야기가 많다. 여기 예수님께서 첫째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그 당시에 유행이었던 것 같다.
특별히 신앙을 잘한다고 하는 분들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다. 기도할 때에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길거리에서 또는 시장 통에서 큰 소리로 소리를 내어 기도한 것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히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기도는 예수님 말씀에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두 종류의 기도가 있는데 첫째는 골방기도라고 부른다. 도대체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보는 사람도 없고 말도 들리지 않는 그냥 자신과 하나님과만 이야기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대화이다, 독백이 아니다. 대화는 말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밀어를, 은밀한 사랑의 대화를 절대로 누가 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 부부가 살 때에 둘만의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인격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인격과 인격, 자기들의 생명과 생명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대화는 절대로 인격과 인격의 대화이다. 사람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털어 놓을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아니다.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를 할 때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된다. 보아서도 안 된다.
여기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이 길거리에 서서 기도할 때 그들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하셨다. 누구에게인가? 어떤 분에 대하여 사람들이 아참 훌륭하다, 어떻게 저렇게 기도를 잘하실까 저분은 아주 신앙이 좋으시구나! 그러면 그분은 사람으로부터 이미 자기상을 다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므로 말미암아 자기만족에 빠지고, 자기의 행복에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주실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이 골방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만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한 없이 이 빈 마음속에 부으실 수가 있다. 여기 예수님께서 골방 기도하라고 말씀 하신다. 성경에는 골방 기도가 있고 다락방 기도가 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한 기도가 나온다. 다락방 기도는 어쩌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하는 기도이다. 하지만 이 다락방 기도가 있기 전에 먼저 골방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함께 보여서 다락방 기도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락방 기도를 원한다. 아니다, 다락방 기도 이전에 우리는 각자 개인이 주님과 함께 만나는 골방기도가 절대로 먼저 필요하다. 이 골방기도에 대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한다.
마태복음 6장 6절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반복해서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계시는’이라는 말씀을 사용한다. ‘은밀한 중에’ 우리 아버지 자신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과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드러내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정말로 우리와만 함께 계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너와만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은밀하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안 본다는 표현이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1:1 의 이 사랑, 절대적 사랑의 표현을 표현하셨다.
부부가 한 방을 사용하고 결혼 생활을 할 때에 누가 그 사람 만의 방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다. 두 사람 만의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그 이불 속에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된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이다. 다시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기 전체를 다 주는, 인격과 마음과 사랑을 다 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해야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해야 된다. 우리가 친구란 단어를 예수님도 사용하셨지만 이 친구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보면 ‘아주 사랑하는 자’ 그런 뜻이다. 강조 형, 사랑한다는 말의 강조 형 동사가 이제 ‘친구’라는 말로 변한다. 그냥 조금이 아니다. 아주 강하게 사랑하는 사이, 이 친구라고 하는 말은 속에 있는 이야기, 자기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내서 내 놓을 수 있는 대상을 친구라고 한다. 아주 진한 사랑, 아주 강한 사랑 그런 표현이다.
야고보서 5장 11절 말씀에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자시니라” 우리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나한테 다 하라는 것이다. 너의 슬픔, 고통, 너의 마음 찢긴 것, 실망한 것 모든 이야기를 나한테 다 해 달라.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의 아픔을 다 듣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사와 찬양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그분은 우리의 시련을 당신의 동정으로,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를 당신의 치유로,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충만함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시편 34편 5절에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하고 노래하고 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는 정말 그 하늘 아버지의 가슴속에 들어가서 실컷 울 수 있고, 통곡할 수 있고 그리고 소리를 높여 찬양할 수 있고 우리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들려서도 보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나와 아버지와 만의 사랑, 내 남편 되신 우리 주님과 나만의 사랑!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받는 사랑, 이 사랑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상관없도다. 내 바라는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영광, 우리 주님 얼굴 밖에 없다”고 노래한 그 노래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짓밟힘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왕따를 당하고 실망과 좌절 속에 심지어는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내 아내, 내 자식들마저 내 친구들마저 나를 짓밟을 때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의 가슴속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가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내 방으로, 골방으로 들어오라! 내가 너와만 있고 싶다! 너를 내 품에 안고 싶다고 하시는 그 초청에 우리가 우리 주심의 갈라진 가슴에, 골방으로 들어가시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6장 5절로 7절
- 사도행전 1장과 2장
- 마태복음 6장 6절
- 야고보서 5장 11절
- 시편 34편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