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목 하라

by blogsta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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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본을 가진 사람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사단은 참소하는 자라고 되어있다. 사단의 직업이다. 예수님의 직업은 동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사단이 사람을 공격할 때, 하나님을 공격할 때 쓰는 무기가 비방이다,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단의 무기이다. 우리가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의 모본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를 정죄하고 자기를 짓밟는 자들 앞에서 결단코 성질을 내거나 복수하시거나 보복하는 말을 하거나 위협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분명히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영락없이 사단을 닮았다. 자기 아버지가 그 탕자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품에 안고 사랑하실 때 그 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그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는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겠지만 마음은 아니다. 그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설명하시면서 근본적으로 우리 속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본성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사랑의 본성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다면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빵 만드는 기계가 없기 때문에 빵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사랑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망가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빵이, 제품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때때로 보도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슬픈 이야기를 듣는지 모른다. 왕따 시켜서 어린 아이가 견디지 못하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정말 기가 막힌 그런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들을 때 가슴이 아프다. 요즘은 그것을 법적으로 형사처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그냥 가슴 아프게 그것이 지나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교자들, 하나님을 훼방하고 비난하는 자들, 이런 자들과 형제를 비방하는 자들은 같은 동일한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매일 용서하라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490번이다. 유대인들은 7이라는 숫자를 완전수로 여겼다. 70씩 7번 그것은 매일 용서한다는 뜻이다. 칠이라는 숫자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 째날, 여섯 째날, 일곱째 날, 다시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 일곱… 7이라는 수가 시간의 충만 수이다. 매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매일 매일 용서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숫자를 계산하는 습관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용서의 한계가 없다. 매일 용서하신다. 물론 죄를 인정하고 맡긴 사람을 용서한다. 결코 맡기지 않은 사람은 용서하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용서가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마음껏 죄 짓고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다시 얘기하면 요한복음 8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용서의 목적은 죄를 그만 두는 것이다. 죄로 인해서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여기 다시 한 번 마태복음 5장 21, 22절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살인이 실제로 밖으로 외적으로 나타난 살인만이 살인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고 비방하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다. 자기의 자존심이 상해서 그 상한 자존심에 의한 분노는 바로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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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24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설명하셨다. 우리가 예배라는 중요한 사실을 그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는데 이 예배에 더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화목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받고 그리고 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에 참예하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말씀은 우리 서로의 용서 이전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 하신다.

마태복음 18장에 화목과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엄청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한 종을 용서하는 주인의 모습이다. 이 주인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탕감 해 주었다. 이 일만 달란트가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이다.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다. 시대마다 다르지만 그 가치로 보면 수백억의 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을 주인이 용서 해줬다. 그때 이 종이 자기에게 많지 않은 돈을 빚진 자기 동료를 잡아 때리고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그때에 주인이 듣고서 그를 불러다 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18장 32, 33절 말씀이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다 탕감해 주었거든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언급하신 대로 하나님의 용서,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우리의 죄의 빚을 갚아주시는 용서가 첫 번째이다. 그래서 그 용서를 받은 자가 다시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 형제와 먼저 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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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예배는 용서받은 자들의 감사와 감격의 예배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예배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자들이 그 용서를 실제로 나누어 주었을 때 그 감사를 예배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분명하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 보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참으로 용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악한 종은 사실은 주인의 용서를 근본적으로 받지 못한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냥 그 주인이 내리는 그 무서운 형벌 그것을 무서워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주인의 용서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주님께서 가서 예배드리기 전에 너의 형제와 먼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화목이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면이 있다. 첫째는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잘못해서 화목을 구하는, 평화를 구하는 화목이 있고 또 내가 잘못 하지 않았고 내가 얻어맞고 고통을 당했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진 빚을 내가 갚아 줌으로 화목하게 되는 두 가지 경우를 말씀한다. 여기서 먼저 내가 잘못한 경우,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된다. 화목하려면 대가는 반드시 지불되어야 한다.

‘화목’이라는 헬라어는 재미있게도 ‘교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내 잘못을 내놓고 상대방도 자기의 잘못을 내놓고 서로를 용서하고 혹은 내 잘못은 내놓고 상대는 용서라는 물건을 내 놓아서 교환할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 물론 상대방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게라도 화목을 청하고 구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내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될, 화목이 이루어져야 되는 주체가 되었을 때는 영락없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을 때 예배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내 속에서,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배는 심히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할 때, 그래서 특히 명절에 부모님 집에 모일 때 그것이 기쁨이 된다. 그런데 형제간에 불목하고 서로 싸우고 그런 가운데서 추석날 혹은 설날에 모였을 때 얼마나 부모님이 불편하시겠는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길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화목 하는 길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자

성경구절

  • 요한계시록 12장 10절
  • 요한복음 8장 11절
  • 마태복음 5장 21,22절
  • 마태복음 5장 24절
  • 마태복음 18장
  • 마태복음 18장 32,33절